‘반전미 가득한 노력하는 천재 감독’

백승기 영화 감독(사진=최재혁 기자)

[CEONEWS=최재혁 기자] 대한민국의 독립 영화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물을 떠올리라고 하면 몇 없을 것이다. 특히 독립영화에서 본연의, 장르의 색이 강한 감독을 찾으라면 더 없을 것이다. 벌써 5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한 백승기 감독은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으로, 영화인들에게 사랑받는 영화를 꾸준히 출품하고 있다. 그의 영화는 이번 부천국제영화제에서 큰 사랑을 받으며 다시 한번 ‘백승기 감독’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백승기 영화 감독이 귀엽게 브이를 그리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Q. 백승기 감독님의 작품은 색이 무척 뚜렷한 것으로 유명해요. 어떤 학창 시절을 보내셨나요?

A. 사실 제가 중학교 때 좀 큰 병을 앓았어요. 그 병을 앓고 난 이후에 인생이 확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죠. 제 인생을 바꾼 그 병은 바로 ‘중2병’이라는 병이었어요.

보통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크게 한 번 아프고 나서 다시 태어나잖아요? 그런데 중2병에 걸리면 관종이 되죠. 관종이 되면 막 관심받고 싶어 하잖아요. 그때가 중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이었는데, 남녀공학이 없던 상황에 집 앞에 딱 생긴 거예요. 

원래는 다른 중학교에 가려고 했어요. 슬램덩크를 보면서 운동부의 감성을 느끼고 싶었는데, 중이병에 걸리면서 이성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에 휩싸여서 교복을 재단하고, 머리에 뭘 바르기 시작했죠.

또, 남자들은 학창 시절에 좋아하는 여학생 하나쯤은 있잖아요. 그 여학생이 연극부에 들어간다길래 따라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극부 활동 자체가 너무 좋더라고요. 문화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어린 나이에 자아가 형성됐죠. 그림 등 내가 만들어낸 것을 사람들이 보고 기뻐하는 모습을 제가 즐긴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죠.

제 그림이 꽤 인기 있었어요. 연습장을 하나 사서 만화 연재했었는데 ‘백승기의 신 정무문’이라고, 친구들에게 300원씩 받고 보여줬죠. 그렇게 문학소년은 꿈을 키워오다 인천에 예고가 생기면서 제가 1기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예고에 들어가서는 그림만 무진장 그렸어요. 그림은 접근성이 좋잖아요. 혼자서 그릴 것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림으로 대학도 가려고 했는데, 영화에 대한 동경이 있던 것 같아요. 그림을 더 잘하고 싶다는 갈증 보다는,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더라고요.

또 마침 타이타닉이 고등학교 때 개봉했어요. 그때 또 마침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어서 타이타닉 보자고 꼬셨죠. 티켓을 두 장 구해서 기다리는데,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 혼자 타이타닉을 봤죠. 두 자리를 차지하고요.

지금은 그 친구에게 감사해요. 알고 보니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마치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주변인과 같은 존재였죠.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영화를 집중해서 봤어요. 왔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이 순간을 기점으로 주변인에게 관심 갖기 시작했어요.

영화적으로도 참 경이로웠어요. 그 큰 배를 이렇게 현실성있게 보여주다니. 인간이 어떻게 만들지? 영화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예술의 끝이라는 판단이 섰죠. 이런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죽는다면 후회가 없다고 여겼어요.

백승기 영화 감독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Q. 그런데 데뷔작 ‘숫호구’의 제작은 한참 뒤에 이루어졌어요. 그동안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A. 아무래도 입시가 중요했던 고등학생이었기에 일단 대학에 진학한 후 군대에 갔죠. 2002년에 입대했는데, 그 시기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잖아요. 영화 개봉 소식을 들으며 한 편으로는 부럽고 행복했죠.

이런 생각을 할 무렵 군대에서 비디오 점호를 해줬어요. 한두 달에 한 번씩 다 같이 영화를 보는데, 그때 봤던 작품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였죠. 

이때 또 한 번 영감을 얻어요. 영화 특유의 키치 표현을 보면서 머리통 한 대 맞은 듯하더라고요. 영화의 방식을 다양하게 가져도 되겠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말자. 제대하면 무조건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죠.

제대하고 영화를 찍으려니 아는 배우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배우를 하려면 제가 연기를 알아야 하잖아요?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설경구 주연의 영화 ‘역도산’에 엑스트라 역을 맡았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단역이지만, 잘하면 도시락 먹다가도 스태프가 찾아와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그런 상상이요. 마치 영화 ‘럭키’의 유해진 배우처럼요. 그렇게 상상하면서 촬영에 임하는데, 제가 그날 엑스트라 천 명 중 한 명이더라고요.

그래도 영화에 출연했으니 뿌듯하잖아요? 아까와 같은 수순으로 좋아하는 후배에게 출연한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죠. 저는 분명히 카메라가 내 앞을 지나갔다고 믿었거든요. 이제 후배와 긴장된 마음으로 제가 출연한 씬을 보는데, 아무리 봐도 저는 없더라고요. 말도 안 된다 싶어서 영화를 다운 받아 1프레임씩 넘기고, 끝까지 확대해서 저를 찾는데 저는 그냥 1화소였더군요.

마냥 좌절하던 저는 대학 엠티를 갑니다. 그래도 엠티는 재밌게 놀아야 하잖아요. 동생이 소유한 200만화소의 뚝딱이 디지털 카메라를 빌렸어요. 술 먹고 노는 모습을 찍으려고 하는데 동영상 기능이 있더라고요? 동영상이 가능하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친구들 모아서 영화를 찍었죠. 당시 여학우가 7명, 남학우가 3명 있었어요. 7명과 3명으로 뭘 찍어볼까. 그렇게 떠오른 아이디어가 ‘백설 왕자와 일곱 난장이’였어요. 제목은 당시 유행한 ‘연가’시리즈와 엠티 장소인 청평이 합쳐져 ‘청평 연가’라는 12분짜리 단편 영화를 처음으로 만들었죠.

찍고 나니까 빨리 집에 가고 싶더라고요. 영화 편집을 빨리해야 하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에 영화 편집하려고 검색하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영상이 허무하게 묻히나 싶었는데 윈도우 안에 ‘윈도우 무비 메이커’라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이 있더라고요? 제 컴퓨터는 ‘똥컴’이라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거든요.

곧장 편집을 시작해서 끝내고 나니까 동이 트더라고요. 드디어 내 첫 영화가 제작됐구나. 스스로 첫 관객이 되어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플레이를 눌렀죠. 음악과 함께 청평 연가 제목이 등장하고 배우가 연기를 펼치고, 클라이막스에 음악이 깔리고, 주인공이 죽고, 자막이 쫙 올라가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제 방 창문으로 햇살이 쫙 비치는데 소름이 돋으면서 깨달음을 얻었죠. 이거구나. 내가 드디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았구나.

백승기 감독은 첫 영화가 완성됐을 때를 회상하며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의 감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은 듯 우수에 찬 그의 눈은, 왠지 많은 이를 영화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을 것만 같았다.

백승기 영화 감독이 갈등 중이다(사진=최재혁 기자)

Q. 첫 영화를 뜻하지 않은 곳에서 시작했지만, 깨달음을 얻으셨어요. 이후 ‘청년 백승기 감독’은 어떤 영화를 제작하셨나요?

A. 깨달음을 얻은 주인공이 결심하듯, 저도 큰 결심을 내립니다. 전공이 서양화인데 교수님을 찾아가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며 절필을 선언했죠. 붓은 실제로 부러뜨리지는 않았습니다. 비싸기 때문에. 

하여튼 상징적으로 꺾었죠. 당시 매주 서양화 한 편을 그렸어야 하는데, 교수님과 매주 한 편의 영화를 찍겠다는 합의를 봤죠. 이제 저는 영화 감독이니까 감독처럼 보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감독들이 쓰는 모자를 사고 다녔죠. 친구들에게도 ‘백 감독’이라고 부르라고 협박도 하고요.

제 결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영화사를 차렸죠. 그때 탄생한 게 바로 ‘꾸러기 스튜디오’라고 동기 두 명과 함께 차렸어요. 집 앞 신포동에 월세 15만 원으로 들어가 영화를 시작했죠. 

백승기 영화 감독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 중이다(사진=최재혁 기자)

Q. 꾸러기 스튜디오의 당찬 발걸음이 마냥 경쾌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A. 당시 상황이 잘 맞아들어갔죠.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중이었어요. 디지털 장비 덕분에 진입 장벽이 낮아졌고, 관객에게 보여주기 어려웠던 영화 산업이 UCC의 등장으로 접근성이 크게 올라갔죠.

시대적 흐름과 맞춰 온라인을 통해 영화를 전파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다른 분들이 올린 온라인 배포 영화를 보면서 좋은 플랫폼을 활용해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짧게 볼 수 있는 대작 패러디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가위손을 패러디한 망치손. 다빈치 코드를 달마도 코드로. 은하철도 999를 실사화한 은하전철 999. 300을 3으로요. 양산형으로 무진장 만들었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됐죠.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비디오 가게를 하면서 영화 공부한 것처럼, 저도 대작을 똑같이 찍어본 거잖아요. 우리 버전으로 미장센만 바꾸고 구도 등을 똑같이 재현한 게 많거든요. 그러다 보니 공부가 됐죠.

다행히 제 영화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해 주셨어요. 그렇게 쭉 커져 나가는데 ‘유튜브로 넘어가냐 마냐’하는 기점이 있었어요. 당시에 유튜브를 시작했으면 말 그대로 1세대였거든요. 그런데 수익 모델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유튜브가 자리 잡아서 유튜버만 해도 잘 먹고 살잖아요. 그때는 아예 그런 게 없었어요. 채널 개념도 없었으니, 우리나라 기업들도 초반에 모델을 상정하지 못한 거죠. 

게다가 당시에는 무단 복제 시절이었잖아요. 제가 영상을 올리면 다른 플랫폼에 저화질로 인코딩돼서 올라갔죠. 저는 꾸러기 스튜디오의 콘텐츠를 블로그에 올려서 메인 플랫폼으로 키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워낙 여기저기 퍼져 나가니까 어쩔 도리가 없더라고요.

진짜 심했던 건 제가 순수 창작물로 영상을 업로드하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이 그대로 카피해서 광고로 내보내더라고요. 어떤 광고는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배우만 바꿔서 내용 그대로 나갔어요. 

또 UCC는 ‘돈이 없어도 하는 애들’이라는 이상한 이미지가 있어서, 광고 의뢰가 들어와도 단가가 30만 원이 넘는 게 없어요. 실제로 영상 하나 촬영하는데 30만 원이나 들어가거든요? 남는 게 아예 없는 거죠.

한 방송국에서는 고정 코너로 의뢰를 하기도 했어요. UCC가 워낙 유명하니까 영화 코너 중에 하나로 UCC를 보여주겠다는 거죠. 그래서 30만 원을 달라고 하니까 못 주겠다더라고요. 방송국놈들.

종지부를 찍었던 사건은 네이버에서 발발했는데요. 소위 유튜브의 채널 개념을 네이버에서 운영하려던 거였죠. 메인 화면에 저희 영상을 올려준다는 건데, 국내 최대의 플랫폼에 노출 되는 건 얼마나 좋은 기회겠어요.

그래서 제가 콘텐츠 제작에 대한 보상을 물어봤죠. 네이버니까 많이 주지 않겠어요? 그런데 보상이 없죠. 네이버에서는 메인에 노출 시켜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희는 영상을 찍으려면 일단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이런 마음을 네이버에 전했더니, 패키지를 주더라고요. 네이버 모자랑 굿즈 뱃지와 컵이였어요. 제가 동네 바보도 아니고 네이버 모자를 쓰고 돌아다닌다고 무슨 인기를 얻겠어요? 어쨌든 저희는 온라인을 통해서 스크린으로 가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었죠.

당시엔 불법 복제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영상을 카피하는 게 도덕적으로도 큰 지탄받지 않았다. ‘오히려 홍보해 준다는데 왜 불만이냐’고 되묻는 사람도 많았으니, 백승기 감독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까.

백승기 영화 감독이 슬며시 웃음기를 보인다(사진=최재혁 기자)

Q. 지금까지 영화에 대해서 말했지만, 사실 지금 백승기 감독님은 현직 교사로도 있으세요.

A. 그렇게 온라인 콘텐츠를 접고 나서 대학 때 받은 교사 자격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죠. 너무 오랫동안 돈을 안 벌고 지냈잖아요.

또 그때 만들어 놓은 동네 극장이 있었어요. 우리 영화를 트는 전용 극장인데, CGV의 대항마로 ‘DGV’라고 지었죠. 동네 극장 빅토리의 약자예요. 15평짜리 슈퍼를 인수해서 실제로 간판도 달고 운영했어요. 영화제도 자체적으로 열었고, 적극적으로 활동도 했지만, 한계에 부딪혔죠.

그래도 저희를 응원하고, 좋아하는 분들이 후원도 해주시지만, 그걸로 어떻게 먹고 살겠어요. 일시적으로 팀을 해체했고, 저는 기간제 교사를 시작했죠. 그때가 20대 후반이었어요.

교사로 있으면서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어요. 학생들하고 영화를 찍기도 했죠. 그러다가 2009년에 드라마 ‘자이언트’에서 남자들의 가슴 웅장한 이야기를 보고, 더 큰 세계로 나가야 한다. 내가 이런 구석에 살 수 없다. 남자는 강남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강남에 사무실을 냅니다.

일부러 역삼역 바로 앞에 있는 오피스텔 건물 제일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로 들어갔죠. 참 겁도 없었는데 지낼수록 너무 무섭더라고요. 강남의 월세는 제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죠. 게다가 거기에 꾸러기 사무실이 있다고 누가 일을 주겠어요? 가기 전만 해도 돈 많이 들어도 좋으니까 때깔나게 해보자고 했지만, 버틸 수가 없었죠. 딱 6개월 있었어요. 6개월 있는 동안도 일은 인천에서 했고요.

그렇다고 인천으로 돌아가기는 싫더라고요. 큰 뜻을 품은 대장부가 1년도 안 돼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그렇잖아요. 또 그 당시에 괜히 홍대병에 걸려서, 이번에는 그쪽 동네에서 그나마 쌌던 상수역 반지하에 들어갔어요.

완벽한 추락이었죠. 반지하에 벌레가 우글우글하고, 심지어는 곱등이들이 매일 나오기도 했어요. 뭐라도 좀 해보려고 인생 첫 가습기, 제습기도 사봤죠. 그렇게 6개월을 버티다가 통장에 100만 원이 남았을 때 ‘여기 남아있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서 인천으로 돌아갔죠.

너무 부끄러웠어요.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왔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죠. 사람이 너무 궁지에 몰리다 보니까 그래도 숨어있는 힘이 솟아나더라고요. 내가 다른 건 다 해봤는데 장편 영화 하나는 찍어서 승부수를 띄워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때 나온 게 ‘숫호구’였어요. 

딱 100만 원으로 한겨울에 찍은 영화였어요. 어떻게 보면 참 뜻깊었죠. 그래도 일단 만들어봤으니까 전국의 모든 영화제에 지원했어요. 그런데 자꾸만 떨어졌다는 소식만 들려오는 거예요. 배우랑 스태프랑 한데 모여 “한국 영화계가 썩었다”며 욕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오더라고요. 당시에 ‘다른 곳 다 떨어져도 되니까 부천만은 갔으면 좋겠다’고 싶었는데, 다 떨어지고 부천에 붙었죠.

백승기 영화 감독이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Q. 백승기 감독님은 부천영화제와 인연이 깊어 ‘부천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부천영화제는 뭘까요?

A. 부천영화제의 인기가 점점 치솟는 것 같아요. 영화 수업 때 학생들도 “부천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케이스가 점점 늘고 있더라고요. 

옛날에는, 지금도 전주영화제를 선호하는 분들이 많아요. 영화학과를 나온 분들을 보면 예술이 가벼워 보이면 안 된다는 무언의 룰이 있어서,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을 많이 선호하죠.

그런데 저는 상업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고, 영화를 어릴 때부터 하고 싶어 했으니까 ‘무엇보다 영화는 재미가 첫 번째다’라고 생각해요. 일단 재미가 있어야 메시지를 넣든 말든 하는 거죠. 메시지만 넣으면 보는 사람은 자연스레 적어지겠죠.

또 요즘에는 OTT 시장이 커지면서 장르 영화가 주목받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장르의 색이 강한 부천영화제가 주목받기 시작하는데, 부천을 가고 싶어서 최대한 ‘병맛’으로 영화를 찍는 분을 몇 명 봤는데 다 떨어지더라고요.

부천영화제의 심사위원도 선이 있는 거죠. 부천영화제의 슬로건이 ‘이상하지만 괜찮아’라고 하잖아요. 그 말에 속으면 안 돼요. 좋은 슬로건이지만, 창작자가 거기에 속으면 안 되는 거에요.

제가 이번 영화제 내내 그랬어요. “이상한 건 이상한 거야.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 돼”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관객들은 그 슬로건을 당연히 즐기셔야 하지만, 괜찮다는 말이 안 나올 수 있는 이상함들도 있단 말이죠.

이와 반대로 저도 부천영화제에서 심사도 해봤지만, 프로그래머님하고 대화를 나눠보면 매번 장르 영화가 부족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세요. 영화는 엄청나게 만들어지는데, 장르 영화가 많지 않아서 오는 갈증이 있어요. 

숫호구로 예를 들면, 나름 병맛으로 홍보돼서 사람들이 “야 이거 엄청 재밌겠다”며 얼마나 웃긴 지 보자는 마음가짐을 갖죠. 초반에 열심히 웃기다가 후반부로 가면 분위기를 꾹 눌러요. 저는 숫호구를 얼마나 웃긴지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게 아니라, 진지함도 필요하니까 의도적으로 연출한 거예요.

그냥 웃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회적 메시지나 인간에 대한 고민은 분명히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부천 영화제를 찾는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백승기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부천에 가지 않음과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할 정도다. 부천영화제의 특색과 너무 잘맞는 백승기 감독의 다음 작품을 부천영화제에서 만나보는 건 어떨까.

백승기 영화 감독이 상대의 말을 경청 중이다(사진=최재혁 기자)

Q. ‘잔고: 분노의 적자’를 보며, 감독님이 주변인과 영화 자체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졌어요.

A. 그렇죠. 사실 전작인 ‘인천스텔라’가 되게 찍고 싶었던 영화인데, 반대로 되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어요. 연출자 입장에서 제가 생각한 것보다 영화가 무겁고 잘 안 터졌죠. 훨씬 재밌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사람의 운에 따른 기운도 같은데, 인천스텔라를 찍을 때 촬영장 분위기도 제 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처음으로 지원금을 받고 찍은 영화여서 그런지 잘 찍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청 컸나 봐요. 유일하게 메이킹 필름이 없는 영화이기도 해요.

그 어렵다는 우주 영화를 찍어내긴 했는데, 다음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천스텔라가 내 마지막 작품으로 포트폴리오화 되는 게 싫더라고요. 그래서 잔고가 제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시발, 놈: 인류의 시작’도 비슷한데요. 인천스텔라와 시발,놈이 거시적인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피로감이 있었는지 후회는 없는데 ‘백승기의 짝수 영화를 피해야 한다는’ 말까지 생겨서 그렇기도 하더라고요.

Q. 시나리오는 어떻게 작성하고, 배우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요?

A. 예전에는 쪽대본 위주로 했어요. 굉장히 러프하게. 숫호구는 거의 애드리브에 가깝죠. 이후에도 촬영 전날 써서 아침에 공지하거나, 5분 전에 공지하거나 했었죠. 잔고부터는 대본을 쓰긴 썼었어요.

점점 배우들이 애드리브를 줄이고 제가 쓴 대로 읽어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제 약간 좀 거장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요. 배우를 보면 잘 살려보려고 애드리브를 짠 건지, 제대로 숙지가 안 돼서 애드리브를 하는 건지 보여서 점점 제 영화가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Q. 감독님의 영화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눈에 띕니다. 평소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으시나요?

A. 아이디어는 모든 것에서 얻지만, 제일 많이 얻어가는 곳은 술자리와 술 먹고 집에 가는 길인 것 같아요. 영화마다 다르긴 한데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하는 때도 있지만, 특정 장면을 먼저 떠올리고 거기에 맞춰 살을 붙이는 편이긴 해요.

평상시에 웃고 떠들다가 영감을 많이 얻고, 잔고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를 보다 갑자기 ‘아는 배우들이 묶여서 동네를 걸어가는 장면’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장고를 시작하게 됐죠.

오히려 시나리오를 써봐야겠다고 폼 잡으면 오히려 잘 안되고, 평소에 농담을 진짜 좋아하거든요. 사람들하고 재밌게 말하는 걸 좋아해요. 저도 어떤 때는 진중한 감독이 되고 싶은데, 평상시에 감출 수 없는 끼가 사라진다면 영감이 안 나올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알코올을 연료처럼 사용해서 텐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Q. 인터뷰 내내 농담도 많이 하셨어요.

A. 그렇죠. 농담이라는 게 기존 틀에서 벗어나야 하는 거잖아요.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은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죠. 과거부터 웃기는 사람들을 광대 취급하고 깔보지만, 세계관을 다 이해하고 있어야 웃길 수 있는 거잖아요. 물론 저질 농담은 그냥 저질 농담이지만요.

그래서 제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데, 마시다 보면 어떤 걸 구상했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 카톡에다 막 적어놓죠.

백승기 감독의 ‘농담론’은 기자도 동의한다. 성공한 농담은 앞뒤 전후의 상황과 현재 분위기를 완벽히 파악한 상태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도 농담을 많이 던진다.

백승기 영화 감독이 작업 도중 자신의 결과물을 심도있게 관찰 중이다(사진=최재혁 기자)

Q.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며 백승기 감독님은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분인 거 같아요.

A. 제가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이유는 ‘간절함’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나요. 영상위원회에서 영화 수업하고 있고, 제작 수업도 하다 보니 영화를 만들어서 오는 분들을 포함해 수없이 많은 메시지와 쪽지를 받고 있어요. 고민 상담도 무척 많이 받고요.

사람마다 MBTI도 다르고, 접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결국 간절히 원하면 그게 무엇이 됐든 행동으로 다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 사람을 너무나 간절하게 원하면 이뤄지겠죠. 저도 돌이켜보면 적당히 좋아했던 애들한테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고백을 미루기만 했어요. 진짜 좋아하는 애한테는 고백했죠.

이처럼 영화는 누구나 만들고 싶다고 말해요. 결국 행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는데, 못하게 되는 저마다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죠. 준비가 부족해서, 잘 만들고 싶어서 등 이유는 각자 다르지만, 결국 완성해내는 사람은 그만큼 간절하고 원해서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백승기 영화 감독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Q. 영화 감독과 교사를 병행하기가 너무 힘드실 것 같아요.

A. 사실 매우 어렵습니다. 방금 ‘간절론’을 말했는데, 실제로 도전하려는 분들한테는 마냥 응원만 할 수는 없어요. 제가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제 강의의 메인 주제가 ‘Make Your film’인데, 영화의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것처럼 홍보해요.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지만, 항상 끝날 때 이 말을 놓치지 않아요. “절대 쉽지 않아요. 쉬운 게 아니에요. 한 번 만들고 나서 뒤에 계속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잘 만드는 건 더 쉽지 않아요”라고 말이죠.

특히 영화를 전문직으로 삼는 분들한테는 더 어려운 일이겠죠. 왜냐하면 둘 중의 하나만 해도 쉽지 않잖아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때마다 수없이 많은 괴로움을 이겨내야 해요. 예를 들어 이번 부천영화제 기간에 출근해야 했어요. 보통 상영이 끝나고 나서 뒤풀이하는데, 감독인 저만 다음날 출근 준비해야 하니 참석할 수가 없죠.

만약 제가 큰맘 먹고 하루 연차를 쓰면, 그 대가로 다른 날 2배, 3배 수업을 해야 해요. 생활이 공짜는 없다고 직장생활이기에 일이 많아요. 제가 또 담임도 하고 있고,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다 보니까 생활기록부도 신경 써야 하니 얼마나 괴리감과 자괴감이 들겠어요.

또, 투자와 같은 중요한 미팅이 잡힐 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싶죠. 그런데 학교 일이 너무 바쁘면 혼란스럽고 집중이 잘 안되거나 해요.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려면 다 이겨내야죠. 그만큼 간절해야 하고요. 세상에는 ‘아웃풋’을 빨리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요. 다이어트도 2, 3일만 굶어도 빠졌으면 좋겠다 싶지만, 꾸준히 운동해야 성과가 드러나잖아요.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영화 한 편 만들어내는 과정이 촬영부터 그 많은 사람의 감정을 다 읽어야 하고, 촬영이 끝난 다음부터 혼자 2, 3개월 동안 후반 작업하면서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 하죠. 

또, 생각지도 못한 돈이 들어가니까 내가 번 돈을 여기다 다 써야하죠. 적응하기도 힘들고, 쉽지 않은 게 너무 많지만, 마음먹고 영화를 한 게 18년이란 말이죠. 그동안 제 인생에서 얻은 아웃풋이 현재 이 상태인 거죠.

저는 다섯 편의 장편 영화를 찍었고 ‘부천의 총아’라는 타이틀도 얻었고, 제가 영화를 찍겠다고 하면 출연료 없이 나와주겠다는 배우도 생겼어요.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죠. 만들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아요. 그러나 결코 18년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백승기 영화 감독이 손을 사용해 설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Q. 감독님은 벌써 4편의 장편을 개봉했고, 부천영화제에서 공개한 ‘잔고: 분노의 적자’도 개봉을 준비하고 있어요. 솔직히 많은 분이 독립영화의 수익을 궁금해할 것 같아요.

A. 그렇죠. 그런데 사실 제가 영화 개봉비로 난 수익이 0원이에요. 어떤 루트로 그렇게 됐는지는 알아요. 생각해 보면 이해도 가죠.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50%를 가져가고, 배급사에서 정산이 시작되죠. 배급사는 영화를 배급하는 데 들어간 돈을 먼저 정산해요.

보통 독립영화 하나 개봉할 때 6,000만 원 정도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실제로 어떻게 쓰는지는 믿음의 영역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면 저희 같은 작은 영화가 50% 떼고, 6,000만 원 공제가 되면 그때부터 배급사랑 저랑 퍼센트로 나뉘는 건데 쉽지 않아요.

요즘에는 운이 좋게 배급 지원이 많이 생겨서, 금액이 상쇄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수익이 들어올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는 0원입니다.

이 얘기를 전하면 많이들 놀라세요. 백승기라고 하면 나름 대한민국에서 브랜드가 있는 편이잖아요. 일류 거장은 아니지만, 나름 독립영화 시장에서 이름 말하면 알 수 있는 정도까지는 된다고 느끼는데, 그런데도 수익이 0원이란 말이죠.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비슷하게, 영화 생태계가 돌아가려면 배급사, 독립영화, 극장이 다 살아야 하고, 시장도 살아야겠죠. 그러니까 상업 영화가 독립영화에 관을 잘 못 내주는 현상이라든가, 독립영화 배급하는 분들도 있어야 하는 게 사실이죠. 영화 시장 안에 들어와 있는 모두가 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제 영화가 관객이 2, 3만 명이 보셨으면 정산이 됐을 거예요. 그러니 다른 거 필요 없고, 저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야죠. 그때까지 다 이겨내려고요.

Q. 문화예술인이 부업을 뛰지 않고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없어, 본업에 집중하기 어려운 시스템이에요. 아쉬움이 많으시겠어요.

A. 많죠. 저희 배우도 각자 하는 일이 다 있어요. 제가 어디 가면 “감독은 직업이 아니고, 작업이다”라고 말해요. 감독님들도 영화만 찍으면서 돈을 버는 분 몇 분 안 돼요. 우리가 아는 유명한 감독님들 조차요.

그러다 보니 감독은 직업이라고 할 수 없죠. 이건 작업이지. 소수의 한두 명 때문에 우리가 착실한 상을 겪으면 안 된다. 직업이 되고 싶어서 작업을 하는 거긴 한데, 어쨌든 직업이 아니고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도, 감독도 결국 직업과 작업 사이의 싸움을 끊임없이 펼치고 있는 거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문화예술인의 부인할 수 없는 불가결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힘들어도 계속 참고 있죠. 솔직히 시스템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죠. 이상적인 바람과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안에 갇혀 있는 모든 구성원의 욕망에 따른 결과라고 느껴요.

상업 영화를 하는 분들 뒤에 돈을 대주는 기업들, 그걸 보고 수요가 몰리는 관객들, 그 안에서 저마다의 가치를 찾고 싶어 하는 독립영화, 그걸 운영하는 영화제와 극장들, 그 안에 배우와 감독까지 모든 구성원의 아웃풋이 현재 상황인 거죠. 불평등이 일어나면 아쉬움이 존재하겠지만, 현재 시스템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여러 가지의 제도와 지원 사업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열심히 잘하는 것뿐이에요. 제 요즘 모토가 ‘100세로이’거든요. 이태원 클라스의 주인공 박새로이를 패러디한 100세로이인데 ‘동인천 클라스, 나의 계획은 20년짜리’라고 말하죠. 참고 기다리는 거예요.

제자나 동생, 주변인들 모두 힘들 때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잖아요. 예전에는 “다 잘 될 거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했죠. 그러나 요즘에는 다르게 말해요. “떼쓴다고 되는 게 아니고, 결국에 우리가 이겨낼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모두 파이팅하자”고 말이죠.

“떼쓴다고 되는 게 아니고, 결국에 우리가 이겨낼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모두 파이팅하자”는 말을 백승기 감독이 하니,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버티고 버텨낸 사람이 전하는 “버텨. 힘내자”는 말이 어찌 심금을 울리는 위로로 다가가지 않을 수 있을까.

백승기 영화 감독이 아름다운 얼굴을 뽐내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Q.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문화예술 교육’이 중요한 이유를 여실히 느끼시겠어요.

A. 현재 대한민국은 입시가 굉장히 중요한 나라고, 초등학교 입학하는 순간부터 경주마처럼 경로가 정해져 있어요. 대학의 가치가 많이 상실됐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무시할 수 없는 구조죠. 저 역시도 대학을 나왔으니, 대학을 안 나와도 된다고 말을 할 수는 없죠. 그래도 저는 연극영화과를 나와, 영화를 전공하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저희 학생들한테도 말하는데, 다수가 선택하는 정해져 있는 매뉴얼을 선택하고 적당한 보상을 받으며 적당한 고통을 받고 살 것이냐. 아니면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가서 더 많은 고통을 느끼고 더 큰 열매를 얻을 것이냐의 싸움이라고 설명해요.

이렇게 말해도 이해하는 학생이 10명 중 3명이라면, 실천하는 학생은 1,000명 중 1명이에요. 이해의 영역이 아닌, 본능의 영역인 거죠. 후자를 선택하는 건 욕구와 본능의 영역이기 때문에 본인조차도 본인을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인 거예요.

문화예술도 마찬가지예요. 창의적인 사람의 영역으로 가려면, 단순히 머리로 오는 창의성은 의미가 없어요. 창의성이야 유튜브만 틀어도 좋은 얘기해주는 사람 많죠. 그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가장 건강한 방식이 ‘문화예술’ 체험이죠.

창작 체험을 통해 남들한테 보여지고, 거기서 오는 피드백을 느껴보는 거죠.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면 맞는 거고, 부끄러움을 느끼면 안 맞는 거예요. 이걸 빠르게 경험해볼 수 있는 게 문화예술이죠.

문화예술 교육 체험은 반드시 아웃풋이 있어야 하고, 관객한테 보여주는 경험까지 해야 완성이에요. 

백승기 영화 감독이 진지한 자세를 취했다(사진=최재혁 기자)
백승기 영화 감독이 진지한 자세를 취했다(사진=최재혁 기자)

Q. 5편의 장편 영화를 촬영하면서 기억 남는 피드백이나 관객이 있을까요?

A. 최근 ‘장고: 분노의 적자’ 피드백이 다 좋아요. 그런데 제게는 약간의 루틴이 있어요. 영화제 피드백, 개봉 피드백, 나중에 파일이 공짜로 풀렸을 때 피드백이 있어요. 그중 영화제 피드백이 가장 좋아요.

이번에 부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할 때 배우들에게 “너희들이 이 영화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피드백을 얻을 거니까, 오늘 마음껏 즐기고 이다음부터 점차 피드백이 줄어갈 거다”라고요. 

확실히 그렇더라고요. 피드백이 개봉하면 조금 나뉘다가 공짜 파일이 풀리면 그때부터는 악플이 많아요. 영화제 때 피드백을 보면 제가 알게 모르게 창작의 영역으로서 숨겨놓은 미장센과 메타포, 메시지를 발견해 주실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아요.

그러나 말했다시피 그것만 내세우고 싶지 않아서 장르라는 혹은 재미, 코믹 요소로 겉을 씌우는 건데, 잔고는 2가지를 다 언급해 주시는 분이 많아서 무척 즐거웠죠.

공짜 파일로 넘어가면 저렴한 쌍욕이 엄청 많고, 제가 숨겨놓은 것에 대한 피드백이 일절 없어요. 이 또한 제가 다 안고 가야 하는 분석해야 할 시장이죠. 

사실 악플에 대해서는 몇 년 동안 백신 4차까지 다 맞았어요. 네 번 개봉하면서 다 맞았기 때문에 이제 5차를 맞을 준비를 마칠 뿐이죠. 

Q. 만약 백승기 감독님이 국내·해외 통틀어 만들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요?

A. 제가 국내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요. 여러 분석적으로 봐도 영화적으로 가장 완벽한 영화고, 굉장히 의미가 깊은 영화에요. 제가 그런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일상적인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판타지가 나오잖아요. 숫호구도 일상 배경으로 시작해서 판타지가 일어나는데, 이런 상황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번지점프를 하다의 ost도 완벽한데, 평상시에도 듣고 다녀요. 특히 “미안해 너무 늦었지.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요”와 같은 대사도요.

저와 함께하는 손이용 배우랑 술을 마실 때도 늘 번지점프를 하다의 ost를 틀어놔요. 사랑에 대한 철학과 이병헌, 이은주 배우의 연기도 너무 좋아해요. 영화가 갖는 사랑에 대한 철학도 최고죠. 잘 모르고 접근하는 분들이 동성애 영화라고 하지만, 초월하는 완벽한 사랑 영화라고 보기에 어떤 관점에서 봐도 다 해석이 가능해요. 그래서 너무 좋아하는 영화죠.

기자가 본 최고의 영화 중 하나가 ‘번지점프를 하다’이다. 백승기 감독이 설명한 모든 부분을 공감하고, 스스로 이병헌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 그의 연기력이 최고로 드러나는 영화가 바로 번지점프를 하다라고 생각한다. 백 감독과의 공통점이 하나 추가됐다. 

백승기 영화 감독이 시그니처 자세를 취했다(사진=최재혁 기자)

Q. 백승기 감독님은 스스로 어떤 감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모르겠네요. 제가 사회적으로 어떤 이미지로 보여지는지 무척 궁금한데, 가끔 커뮤니티 반응을 보면 약간 또라이고 막 웃기는 ‘괴짜 감독’ 이미지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생각한 것보다 굉장히 치밀한 감독입니다. 이렇게 만나서 얘기해보면 좀 느껴지시죠? 저는 생각보다 영화에 진심이고, 진지하고 고민을 많이 하고 영화를 찍고 있어요. 막 찍는 것 같아도요. 그래서 배우들도 현장에서 굉장히 혼란스러워하죠.

저는 이미 머릿속에 세팅을 충분히 해놓고 찍어도 되겠다 싶어서 배우들을 불러 모으는 건데, 배우들은 이해가 안 되나 보더라고요. 제가 맨날 술 먹고, 놀고 있는데 갑자기 불러서 영화를 찍는다니까 본인이 뭘 찍는 건지도 모르겠는 거죠. 나중에 가보니까 이게 다 영화가 되어 있다고 느끼는 거죠.

Q. 인터뷰 내내 즐거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때론 진지하고 진중했어요.

A. 창작자 관점에서 인터뷰와 같은 관심은 자양분이에요. 관객의 사랑은 없으면 죽는, 밥 같은 존재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리프레시도 되고, 리마인드도 되니 계속 상기되거든요.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내가 오늘 그런 말을 많이 했네. 내가 최근에 이런 상태구나’라고 느껴요. 인터뷰가 공통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비슷하지만, 디테일이 달라지는데 그걸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죠. 또, 기사가 올라와 많은 분이 봐주시면 배우와 스태프에게 큰 힘이 됩니다. 

지금 이 모든 행위가 저란 사람에게 자양분이 되고, 더 크게 보면 한국 영화 시장에도 작은 1g이겠지만, 분명히 좋은 영향을 끼쳤을 거로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봐주신 분들에게 읽어주신 걸 후회하지 않도록 좋은 감독이 되겠습니다.

백승기 감독과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니, 영화와 비슷한 것 같기도, 다른 것 같기도 한 신비한 인물이었다. 영화처럼 때론 웃기고 재밌는 사람이다가도, 본인이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굳세게 18년이라는 시간을 단단히 버틸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그가 100세로이가 되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더욱 빛날 앞날이 기대된다. 

CEONEWS는 국제 의료 NGO ‘한국머시쉽‘의 활동을 응원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씨이오뉴스-CEONEWS-시이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