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주식(主食)’처럼 찾아와주세요”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사진=이주형 기자)

[CEONEWS=최재혁 기자] 현대 시민에게 필요한 건 뭘까.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풍족한 돈? 타인의 인정으로 차오르는 명예? 아니다. 단순히 보이고, 느껴지는 돈과 명예는 현대 시민의 충분조건일 수 있지만, 필요조건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의 소양을 북돋아, 깊은 삶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는 ‘문화’는 필요조건이 될 수 있다. 이에 기자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문화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대인의 문화 소양을 키우고자 한다.

그중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은 오랜 전통을 지닌 서울 연극계의 중심에 서, 연극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무게를 지녔다. 그를 통해 연극의 역사와 흐름에 대해 파악하고, 연극의 문제를 살펴보며 독자가 더 나은 문화생활을 영유하길 바란다.

대화 하고있는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사진=이주형 기자)

Q. 서울연극협회장으로서 서울 연극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세요.

A. (웃음) 아무래도 오래된 서울 연극의 역사다 보니까 복잡한 얘기가 많은데 기억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는 서울 연극이 대학로보다 신촌 쪽에 많이 포집 돼 있었는데요. 80년대에 정치적인 박해를 받다 보니까 쫓겨나다시피 대학로 쪽으로 하나둘씩 자리 잡았죠. 연극인의 습성상 같이 붙어 있으려는 게 있다 보니까요. 함께 있어야 작업하기도 편하니까요. 

대학로에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 극단들이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점점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규모와 밀집도를 자랑하죠. 런던의 소호거리나 뉴욕의 브로드웨이도 한데 모여있지만, 대학로는 극단이 오밀조밀 모여있으니까요. 하다못해 연극인들조차 종로와 성북을 중심으로 반경 2~3㎞ 내에 50% 정도 모여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죠.(웃음)

또 연극의 부흥기라고 하면 기준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7~80년대가 가장 안복한 시절이겠죠. 지금은 집 앞 영화관이나 넷플릭스, 또 해외 공연이나 작품을 유튜브로 볼 수 있는 데다가 뮤지컬도 자주 내한하잖아요. 요즘은 놀거리가 참 많아졌죠.

그때는 대학생이라고 하면 다 한 번씩 폼생폼사로 연극 공연을 찾아갔을 정도니, 당시 히트했던 작품은 떼돈을 벌 정도였죠. 대표적으로 ‘신의 아그네스’ 같은 경우에는 ‘돈을 쓸어모았다’라는 전설이 내려질 정도예요.

전반적으로 당시에는 극단 수도 지금보다 많지 않았지만, 인문학적인 사회 인식이 활발할 때라 그런지 ‘인문학’의 가치가 상당히 높게 평가됐잖아요? 그래서 연극의 인기와 맞물리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대화 하고있는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사진=이주형 기자)

Q. 현재 대학로는 ‘상업극’이 주를 이루고 있어요.

A. 우선 상업극의 발발부터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레퍼토리 공연’이라고 불리는 장기 공연, 상업극이 90년대 후반, 2000년대부터 국내 뮤지컬의 대중화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함께 성장했죠.

상업극은 기획사의 작품으로, 전문 제작 극단과의 차이가 명확하거든요. 아무래도 기획사는 전문 경영인이 있는 데다가, 홍보나 이동성이 워낙 탁월하다 보니까 극단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외됐죠.

그렇지만 상업극과 극단의 작품은 서로 밸런스를 맞춰야 하거든요. 장기로 공연되는 상업극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와 전체적인 연극의 부흥을 이끈다면, 반대편에서는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실험이 왕성하게 이루어져 전체적인 질이 높아져야 하죠. 

사회적인 담론,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파고드는 작품도 필요하죠. 현장에서 다양한 작품이 태동해야 하는데 어느 하나가 부족하게 되면, 마치 자연의 생태계처럼 먹이사슬 구조가 무너질 것은 뻔한 거죠. 한쪽의 밸런스가 너무 치우치다 보면 인기가 오래갈 수 없죠.

박 협회장이 연극 역사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말하겠다’고 했지만, 듣는 내내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7~80년대의 연극이 어떻게 지금까지 흘러왔는지, 현재의 대학로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감이 잡히자 문제점도 한눈에 드러났다.

대화 하고있는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사진=이주형 기자)

Q. 더 많은 시민이 다양한 연극을 접해야겠어요.

A. 물론이죠. 우리가 지금은 공연비도 제대로 못 받고 열악하게 공연하고 있지만, 여기서 송강호도 나오고, 황정민도 나오고, 김희원, 진선규 등 수많은 배우가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고 있잖아요? 그런데 연극 생태계가 무너지면 더는 안정된 공급자가 나올 수 없는 거죠.

배우를 3년 뒤에도, 5년 뒤에도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배우의 흥행작이 몇 년에 한 번씩 나오더라도, 그 사이사이에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가야 유지할 수 있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지거나 도태되죠. 무대도 마찬가지로, 1년 안 쓰면 청소해도 흔적이 남아요. 배우와 연기도 이와 같죠. 

좋은 배우가 다양한 작품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말씀드렸다시피 다양한 작품 활동이 필요해요. 요즘은 연극에서 재미를 많이 찾으시지만, 연극인들은 단지 재미를 가장 큰 목적으로 삼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 ‘우리 시대에 어떤 고민을 전할 것인가’ 등처럼 우리 사회에 필요한 논쟁거리가 뭔지 집착해야 하죠.

하지만 논쟁거리는 아무래도 딱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죠. 어려운 이야기조차 재밌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참 쉽지 않아요. 그런데 예전 관객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공연에서 고민과 재미에 대한 균형을 찾았다면, 현재는 재미에 많이 쏠려있죠.

요즘 아침부터 마로니에 광장에 학생들이 적게는 3, 40명부터 많게는 1,000명까지 현장 학습으로 공연을 보러 와요. 그런데 대부분 상업극 아니면 뮤지컬을 보죠. 그 학생들이 연극을 보는 건 좋은데, 일종의 편식이라고 할까요? 재미 요소만 따라가고 있죠.

그래서 저는 나라에서 초등학생부터 공연을 많이 보도록 안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그러한 의식을 갖는 나라에서는 어린 나이부터 의무적으로 공연을 보도록 돕고 있어요. 일종의 학생과 공연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거죠. 아무래도 우리가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달려오다 보니까, 진지한 고민과 토론에 대해 어색해하지 않나 싶어요.

대화 하고있는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사진=이주형 기자)

Q. 아무래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극인의 생활이 녹록지 않아요.

A.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다시피 많이 힘든 상황입니다. 대부분 연극인이 최저시급도 못 받고 있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뛰지 않는 이상 생활이 참 어려운 편이죠.

저는 힘든 연극인들을 위해 나라에서 나서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나라의 지원금은 정말 미약하지만 대부분 제작비에 지원돼요. 배우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없죠. 

프랑스로 예를 들자면 연출가는 배우들의 연습 시간을 책정해서 보고하면, 그 시간만큼 나라에서 최저 임금으로 계산해줘요. 그러면 최소 생활은 되는 거죠.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연극인에 대한 시선이 “네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그런데 왜 불만을 가져?”라는 시선으로 보니까 해결이 안 되는 거죠. 나라에서는 복지, 예술인 정책 그리고 사회 기반시설 등에는 시민 개인이 필요로 하더라도 나라에서 값을 지불하죠.

사회 경제가 안 좋아져서 나라에서 중소기업, 대기업을 지원하는 건 당연히 여기는데, 예술인에 대해서만 악의적인 시선으로 보는 건 잘못됐죠.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예술의 유지와 양성에도 힘써줘야겠죠. 

박 협회장은 현재 연극계의 안타까운 점을 언급할 때마다 표정에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처한 현실이 암울하지만, 앞으로도 시민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난 5월에 열린 서울연극제에 대해 언급하자, 이내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박정의 협회장이 연극 게시판을 바라보고있다(사진=이주형 기자)
박정의 협회장이 연극 게시판을 바라보고있다(사진=이주형 기자)

Q. 서울연극협회에서 주관한 서울연극제는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A. 물론 극단에서 평소에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서울연극제에서는 있는 힘을 쥐어짜다 보니 퀄리티가 더 올라갈 수밖에 없겠죠.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극단도 있고요. 게다가 상이라도 받게 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어요.

이렇게나마 극단들이 힘을 받게 되는데, 사실 출품되지 못한 극단의 경우에는 많이 서운해하죠. 어쨌든 서울연극제와 같은 축제를 통해서 극단도 더 시간을 내고 열정을 바쳐서 좋은 작품으로 만날 기회가 무척 반갑죠. 이를 통해서 연극에 빠져드는 시민도 많고요.

극단의 경우에는 예술가들의 활동이 중심이 되는 편이죠. 연극인이 모여 “난 이게 하고 싶어”라면 그냥 하는 거에요. 상업극과는 다르죠. 순수 예술은 그래요. 작가 개인이 극단 자체에서 관객이 얼마나 많이 볼까, 얼마나 좋아할까에 대한 고려를 하는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죠. 

또 어떤 극단은 정말 여건상 안 만드는 게 맞는데 그냥 재밌게 만들어보자.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또 막 만드는 때도 있고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어서, 관객들이 그냥 왔을 때 재미있게 볼 공연도 있고 이게 뭐지 싶어 할 수 있어요. 정말 다양한 공연이 있죠. 

그런데 이게 또 장점이거든요. 다양하게 배우 팀들이, 예술가들이 재밌는 공연이든 너무 심각한 공연이든 너무 실험적인 공연이든 조금 퀄리티가 떨어지는 공연이든 “해볼래?” 혹은 ‘해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죠.

기자와 대화하고 있는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사진=이주형 기자)
기자와 대화하고 있는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사진=이주형 기자)

Q. 협회장님으로서 혹은 연출가로서 관객이 연극을 어떻게 바라봤으면 좋겠나요?

A. 예전에 연출적인 마인드가 되게 강했을 때는 아집 같은 게 있었어요. ‘너무 가벼운 연극을 찾을 것 같으면 왜 내 작품을 보러 와. 그냥 나는 내 작품 세계를 가고 싶어. 내가 대중의 기호에 의해서 내 작품 세계를 바꾸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했죠.

외국 같은 경우에는 공연을 자주 봐서 ‘저 연출은 이런 스타일이야’, ‘저 극단은 이런 스타일이야’,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극단이야’, ‘여기 가면 즐거워’,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냥 궁금해서 다 보는 거야’ 등 자신만의 주관이 정해져 있죠. 

그런데 공연을 처음 보거나 일반 시민은 그냥 그 자체로 이게 재미있었는지, 안 재미있었는지를 보러 가는 거잖아요. 전자의 경우는 공연 시장이 관객들의 층위가 다양하고 좀 더 포용력이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관객들에게 포용력을 더 기대하기 기대할 수 있는 포용력의 폭이 되게 좁은 거죠. 관객의 포용층이 넓을수록 공연은 더 다양해질 수가 있죠. 

그러려면은 관객들이 공연에 굉장히 익숙해야 해요. 예를 들면 우리 애들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부터 공연을 많이 봤을 거 아니에요. 공연 끝나고 나서 “어땠어? 재밌었어?”라고 가볍게 던져요. 

이 질문은 다음을 얘기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지, 재미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아이가 “이야기는 지루했는데 배우는 되게 설득력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왜 거기서 그 살인을 꼭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면 이건 고민거리인 거예요. 분명히 앞부분에 이야기는 지루했다니까 조금 재미없었다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나눌 얘기가 많아요. 만약에 “재미없어. 이런 걸 왜 봐?”라고 말하면 끝나버리는 거죠. 이런 관람 문화가 생성됐으면 좋겠어요.

시민들께서 연극을 ‘주식(主食)’처럼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어느 날 외식, 혹은 특별식으로 먹는 음식 같은 경우는 자극적이고 색다를 필요가 있잖아요. 그런데 유럽이나 러시아는 매주 금요일이면 늘 공연장을 찾아요.

재밌을 때도 있고, 재미없을 때도 있고 그래요. 그런데도 그냥 거기 가서 앉아 있어요. 사람들 생각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읽는 거죠.

우리가 하루 세끼 먹는 음식들은 정해진 입맛을 딱 충족하잖아요. 그런데 특별히 오늘따라 더 맛있어지는 이런 건 아니잖아요. 마치 생활처럼, 습관적으로 먹지만, 조금의 맛의 차이를 느끼고 비슷한 점도 느꼈으면 좋겠어요.

박정의 서울연극협회장의 근심은 기자에게도 전해졌다. 연극의 장점은 명확하다. 바로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의 실감 나는 에너지를 전달받고, 다른 매체가 줄 수 없는 문제의식과 충격을 선사한다. 결국 방법은 더 많은 시민이 연극을 찾아주는 것뿐이다. 인터뷰를 통해, 더 많은 시민이 연극의 관심 두길 바란다.

CEONEWS는 국제 의료 NGO ‘한국머시쉽‘의 활동을 응원합니다.
저작권자 © 씨이오뉴스-CEONEWS-시이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