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2차 세계대전 극복한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대공황...‘뉴딜 정책’으로 대전환

프랭클린 루스벨트(사진=백악관)
프랭클린 루스벨트(사진=백악관)

[CEONEWS=최재혁 기자] 2022년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어지럽다. 전국에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큰 혼란을 겪고 있으며,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을 필두로 거대 여·야가 격하게 치고받는 중이다. 참으로 고통스럽다. 현재도 앞으로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돌파구는 없을까? 이때 필요한 게 바로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처럼 암울한 상황을 벗어난 이를 통해 ‘쥐구멍’이라도 찾아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사진=백악관)
프랭클린 루스벨트(사진=백악관)

압도적 표 차이로 대통령 당선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 뉴욕 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 사회의 나름 유복한 지주이자 델러웨어 앤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루스벨트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육과 여행으로 견문을 쌓다가 14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하버드에 입학하여 3년간 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1905년 3월 17일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이자 자기에겐 먼 친척뻘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다.

그러다 1910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13~1918년까진 제1차 세계대전도 겪으며 제프 대니얼스 해군 장관 아래에서 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한다. 

19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M. 콕스와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됐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윌슨 대통령이 주도하다 결실을 맺지 못한 국제연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등으로 제임스 콕스 후보가 공화당 워런 G. 하딩 후보에게 패하며 루스벨트도 함께 낙선한다.

잠시 병을 얻었다 회복한 그는,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는데 이때 버팀목에 의지하여 연단까지 스스로 올라가 군중들을 감동시켰다. 그 후 1928년 정계에 완전히 복귀해 민주당의 뉴욕 주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고 1930년에 큰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1932년 1월 대통령직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고 민주당의 지명을 받아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차에 탄 프랭클린 루스벨트(사진=백악관)
차에 탄 프랭클린 루스벨트(사진=백악관)

대공황...‘뉴딜 정책’으로 대전환

1929년 터진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경제적 비상 사태를 맞닥뜨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기 미국이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내놓은 일련의 정책들을 말한다. 흔히 회자되는 경제적 영향 외에도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장기적인 영향을 남겼고, 결과론적으로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게 한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첫 100일"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미국을 회생시키기 위한 법안들을 의회의 적극 협조에 힘입어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먼저 통과된 것이 연방정부가 대폭적인 지원을 해줌으로써 공황 상태로부터 은행을 구출하여 은행의 업무를 정상화시키려 한 긴급은행법으로, 이와 함께 금본위제 중단을 통해 금의 유출을 막아 통화 안정과 유동성을 확보하는 한편 또다시 금융 시장이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제동 장치를 마련하는 증권법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대표하는 공공사업진흥국을 설립했다. 뉴딜 정책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광범위한 실업률 구제 사업으로 내놓은 것으로, 지방 정부들과의 연계를 통해 병원, 다리, 공원 등의 시설 공사에 투입될 비숙련직 일자리들을 창출하고, 여기에 더 나아가 음악, 미술, 연극 등 예술 산업에도 손을 뻗쳐 수많은 예술가를 지원했다. 

그야말로 뉴딜 정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책으로 한창 땐 330만 명의 실업자들을 고용 상태로 돌려놓는 경제적 영향은 물론, 상대적으로 소수이나 여성들 또한 일자리를 마련 받아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일부 흑인 예술가들이 정부 지원받아 예술계에 족적을 남기기도 하는 등 사회적 영향 또한 큰 정책으로 평가된다.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정책들은 대공황이라는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던 미국 경제를 붙잡아 다시 회복세로 돌리는데 성공한다. 당장 1937년 GNP, 산업생산지수, 통화량 등 지표 기준으로 대공황 이전 수준까지 회복됐으며 실업률도 제법 낮추는데 성공하며 지금까지 회자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3년 11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하고 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가운데)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오른쪽) 영국 총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사진=백악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3년 11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하고 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가운데)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오른쪽) 영국 총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사진=백악관)

세계대전 종결 직전 사망

그의 3기 임기가 시작되고 1941년 일본제국의 진주만 공습 이후, 루스벨트는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선언한다. 직후 미국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선전포고도 받으며 동시에 2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1945년 2월이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얄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국제연합의 창설모임을 4월 25일 가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의회에 제출한다.

1945년 3월 말, 루스벨트는 휴식을 위해 웜스프링스의 별장에 있었다. 4월까지 시간을 보내던 루스벨트는 애견 팔라와 산책을 하고 벽난로 앞에서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아 비서와 농담을 하던 중 오후 1시 15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35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미국은 대통령 사망 혹은 탄핵 등 유고시 선거를 하지 않고 부통령이 자동으로 대통령이 된다. 이에 따라 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33대 대통령에 올랐다.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유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최고의 악재를 만났지만, 적극적으로 맞서며 시민에 ‘안정’을 안겼다. 이에 그는 4선까지 성공하며 지금까지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자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쯤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바라보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급변하는 정세와 나라 안팎으로 다양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 총부리를 바깥으로 돌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안에서 시끄러우니 19세기 말 조선을 보는 것도 같다. 과연 윤 대통령은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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