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나이에 ‘신의 목소리’ 들어
구국의 영웅이지만, 억울히 화형

잔 다르크 초상화(사진=프랑스문화박물관)
잔 다르크 초상화(사진=프랑스문화박물관)

[CEONEWS=최재혁 기자] 유럽에서, 그것도 몇백 년 전에 있었던 ‘마녀사냥’이 현대에 재현되고 있다. 사회가 척박해진 탓인지 개개인으로 갈라진 우리네 공동체는 타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어제의 영웅이 내일은 역적이 되며 하루아침 사이에 사라지기도 한다. 이에 마녀사냥의 가장 큰 희생자이자, 역사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잔 다르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허점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구국의 영웅이지만, 억울히 화형

잔 다르크는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시대의 군인, 기사다. 프랑스의 구국의 영웅이자 가톨릭, 성공회 성인, 그리고 프랑스의 수호성인 중의 한 명이다. 평민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국과의 백년전쟁 말기에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전해 전세를 유리하게 역전시켰다. 

그녀의 기적적인 활약으로 인해 결국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이기고, 잉글랜드를 대륙에서 축출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잔 다르크 자신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고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조국 프랑스로부터 구명도 받지 못했으며, 종교재판을 받고 억울하게 화형됐다. 

그녀는 사후 프랑스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시복·시성되어 그 명예가 회복됐다.

13세 나이에 ‘신의 목소리’ 들어

잔 다르크가 살던 당시는 백년전쟁의 막바지로, 전황은 프랑스에 대단히 불리했다. 왕이 되어야 할 왕세자 샤를은 대관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는 잔존 아르마냑파와 스코틀랜드의 도움에 힘입어 프랑스 남부에서 여전히 적법한 왕세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북프랑스를 장악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이를 토벌코자 하였으나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같은 해에 사망하고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이 되면서 정국이 어수선해져 본격적인 남하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은 장기전, 약탈전 위주로 변하였고 서로 자기 영역권 내에서 기반을 닦는 데에 치중하고 있었다.

전쟁의 여파는 잔 다르크가 살던 동레미 마을에도 들이닥쳐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동레미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일들이 발생했다. 잔 다르크의 가족을 포함한 동레미 주민들은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인근 마을로 피난해야 했다. 

그런 혼란이 지속되던 와중 1425년, 불과 13세의 잔 다르크에게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목소리에 처음에는 당황해서 거절했으나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1428년, 마침내 16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할 것을 결심했다.

‘영웅’ 잔 다르크, 적에게 넘겨져

결심을 굳힌 잔 다르크는 곧바로 샤를을 알현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당했으나,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지냈다.

영주는 잔 다르크가 마녀라고 의심하였기에 구마 의식을 할 수 있는 사제를 보내 시험해 보았으나, 그는 오히려 반갑게 맞아들여 의심을 풀게 했다. 끈질긴 요청에 기사들은 잔 다르크의 뜻에 동조했고, 결국 영주는 샤를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잔을 시농으로 보낸다. 

잔 다르크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샤를 왕세자는 일군을 주고 유능한 기사들을 딸려주어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도록 출병시켰다.

그는 전장에서 심각하게 눈에 띄는 순백의 갑옷과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으며, 잉글랜드군을 차례차례로 패퇴시켰다.

마침내 1429년 5월 오를레앙을 해방한 잔 다르크는 한때 잉글랜드에 충성 서약을 하고 트루아 조약을 지지해서 프랑스 왕실의 의심을 사던 리슈몽 백작이 이끌던 군대를 만나 그에게서 "네가 성녀라도 두렵지 않고 마녀라면 더 두렵지 않다" 는 말을 들었으나 결국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430년 5월 23일 휴전한 사이에 다시 힘을 키운 선량공 필리프 휘하의 부르고뉴파 군대가 콩피에뉴에 침입하자 잔 다르크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 대략 200명의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급파,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초반에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증원군 6천 명이 나타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성으로 후퇴하면서 후방을 방어해야만 했다. 잔은 자신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자신의 병사들을 최대한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잔이 들어오기 전에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끌어올려져 고립되었고, 리니 백작 소속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포로로 잡힌다. 훗날 지원군이 뒤늦게나마 오면서 콩피에뉴의 방어에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리니 백작은 샤를 7세에게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 포로 처리법대로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고 제의했지만, 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샤를 7세에게서 잔의 정치적인 용도는 이미 다 사라져 버린 후였던 것이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리니 백작은 1만 리브르 트르누아의 거액을 받고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넘겨버린다.

잔 다르크 화형 모습(사진=프랑스문화박물관)
잔 다르크 화형 모습(사진=프랑스문화박물관)

‘이단’ 혐의로 화형 당해

파리로 호송된 잔 다르크는 당시 잉글랜드파 및 부르고뉴파에 소속되어 있던 파리의 이단 심문관들에게 넘겨져 이단 재판을 받았다. 결국 이렇다 할 혐의를 입증해내지 못한 코숑 주교는 마지막으로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이에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잔은 고문과 화형 위협을 포함한 협박을 받아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잔은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명하면 수녀원에 감금한다"는 약속과 달리, 여전히 군사 감옥에 가둬놨고 여자 옷을 입게 하고선 병사들을 보내 위협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은 마녀로 몰 것이 뻔했다. 결국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은 남자 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빌미로 재판정은 이단 판결을 내린다.

이로써 잔 다르크는 화형을 선고받아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억울하게 화형에 처해졌다. 잔은 마지막 소원대로 화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루앙 시민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몇몇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고, "나를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경건한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수백 년 후 잔다르크가 시성되면서 루앙의 화형장 터에는 잔에게 봉헌된 성당이 지어졌으며, 특히 화형이 집행된 바로 그 지점에는 대형 십자가가 세워졌다.

향후 샤를 7세는 25년이나 지나서야 잔 다르크의 명예 복권을 선언했고,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의 요청을 받아들여 1456년에 잔 다르크에 대한 복권재판을 지시했다.

그야말로 토사구팽이었고, 이순신을 두려워한 선조의 행동이었다. 그렇게 잔 다르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끊임없는 마녀사냥을 개시하고 있다. 우리가 죽이는, 죽이려는 상대가 진정 마녀일까? 아니면 단지 눈엣가시일까? 올바른 판단을 위해 개안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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