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CEO 추모-회장님! 그립습니다]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 편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CEONEWS=박세영 기자]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

제약업계 최초로 상장한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기업에 관한 어록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유일한 창업주의 기업가 정신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기업가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행동주의 펀드 KCGI와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2022년 11월 21일 공동으로 개최한 '제1회 한국기업거버넌스 대상' 시상식에서 고(故) 유일한 박사를 경제 부문 대상에 선정한 바 있다. 유일한 창업주는 1971년 3월 11일 별세. 향년 76세. 올해 52주기다. 유언장을 통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유일한은 9살 때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나 31살에 미국에서 성공한 청년사업가가 되어 1926년 고국 땅을 밟았다. 조국의 비참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국민 건강을 지키는 제약업을 선택하게 했다. “건강한 국민만이 장차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라는 신념은 1926년 12월 10일 제약회사 ‘유한양행’ 설립을 통해 실현했다.

유일한은 타고난 사업가로서 뛰어난 경영 감각과 혁신적 아이디어로 유한양행을 굴지의 제약회사로 키웠다. 1936년 개인기업을 법인으로 바꾸는 결단도, 1962년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하며 자본과 경영을 분리한 것도, 1969년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며 자식이 아닌 회사 임원에게 사장직을 물려줘 전문경영인 등장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도 유일한이 가진 기업 철학의 실천이었다.

투명경영과 성실납세는 기업 경영의 제1원칙이었다

일제시대와 1960년대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유한양행을 향한 세무조사의 칼날은 1원도 탈세하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며, 모범납세기업으로 선정되는 계기가 됐다. 1968년 유한양행은 모범납세기업으로 동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유일한이 평생 기업가로서 펼쳐온 국익 사상, 혁신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실용주의, 낭비를 절대 허용치 않는 근검절약의 정신과 청지기 정신은 한국 사회 기업사의 보기 드문 모범이 되고 있다.

유일한에게 기업활동은 그 자체가 교육사업이며, 공익사업이었다

귀국 후부터 시작된 개인적인 장학, 공익사업은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든 1953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유일한은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설립하고 1960년대에는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항구적인 교육장학, 사회원조사업을 위해 유한양행 주식 등 자신의 재산을 출연해 1970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 및 유한학원)’을 발족하였으며 유언장을 통해 전 재산을 이 기금에 기증했다.

생전에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보다 교육사업가로서 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유일한 박사가 외국 출장 시에도 ‘유한양행 회장’ 명함보다는 ‘Educator’라 쓰여 있는 명함을 즐겨 사용했다는 일화만 보더라도 교육에 대한 그의 애정과 태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틈만 나면 우리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기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진짜 기술인을 좋아했던 유일한이 기술 전문학교인 유한공고를 세운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는 학교를 세울 때부터 탁상공론을 철저히 배격했다. 일하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갖고 있는 교육관이었다.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유일한은 생전에 시간만 있으면 학교를 찾았다고 한다. 젊은 학생들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했으며, 격의 없이 어린 학생들을 안아 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했다고 한다.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쉬는 시간이나 운동장에서 격식 없이 잠깐씩 만났으며, 학생들에게 하는 말도 늘 같았다. “너희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발전한다.” 신임교사들에게 했던 당부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이끌 훌륭한 인재를 키워 달라.”는 당부를 항상 잊지 않았다고 한다.

유일한은 독립운동가다…하지만 그를 독립운동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미국에서 14살 때 조국 독립을 위한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에 자원입대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다. 1919년 24살의 대학생이던 유일한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한인자유대회에서 한인대표로 결의문을 작성, 낭독하는 등 활약했다.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민족기업으로 성장시킨 후, 유일한은 1938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집행부에 가담하였고, 이후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활발한 애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42년에는 LA에서 재미 한인들로 무장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1945년에는 버지니아주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이는 IPR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생전 그의 침묵으로 유 박사의 독립운동은 사후에야 연구가들에 의해 알려졌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 중 정점은 냅코(NAPKO) 작전이었다. 유박사는 1942년부터 미육군전략처(OSS)에서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OSS의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작전에 공작원으로 입대했다. 이 작전은 한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독수리 작전과 합동 수행으로 한국인을 국내로 침투시켜 정보 수집, 폭파, 무장 유격활동 등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50세에 공수훈련까지 받으며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45년 8. 15 광복으로 냅코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하여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한 그의 애국애족 정신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교육장학 사업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공헌했다.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한 사우공제회, 보건장학회, 유공관리기금 등을 설립했고 1970년에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설립해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원조사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했다.

이 기관은 1977년 법률규정에 따라 ‘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명칭이 변경돼 현재까지 각종 공익사업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기관 설립 이듬해인 1971년 타계할 당시 개인소유 주식 14만941주(발행주식 수의 20.6%)를 기부해 현재 유한재단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1년 3월 11일 영면 시까지 유일한이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 개인주식은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현재가치 약 8850억원)에 달한다. 이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실천해 온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철학의 완성작으로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쉬며 많은 기업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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