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5가’를 제약보국 상징으로 만든 1세대 CEO

보령제약 김승호 명예회장.
보령제약 김승호 명예회장.

 

[CEONEWS=조성일 기자] 특정 지역에 대한 기억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기억이 한 가지로 모인다면, 그건 역사 속에 깊이 뿌리박은 그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무엇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종로5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종로5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외국인이라면 이것저것 K-푸드를 체험하는 광장시장을 떠올릴지 모르겠는데, 한국인들은 보령약국이다. 그 보령약국은 이제 우리나라의 제약 산업을 앞에서 이끌며 매출 1조 원을 바라보는 중견기업이 되었다. 환갑을 넘기고도 일곱 살을 더 먹은 보령의 장수비결은 무엇일까. 그건 창업주 김승호 명예 회장의 철학과 기업가정신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그래서 이번 CEO 탐구는 보령의 김승호 회장을 선택했다.

 

보령약국은 종로5가 약국거리의 원조이자 발상지다.
보령약국은 종로5가 약국거리의 원조이자 발상지다.

 

직업군인의 길 대신 선택한 약국 경영

 

김승호 명예회장은 보령약국이었던 회사 이름이 보령약품’, 그리고 보령제약을 거쳐 보령이 되기까지 전 과정에 함께한 1세대 창업가이다. 지금은 큰딸 김인선 씨가 회장직을, 그의 아들 김정균 씨가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고 있다. 우리 경제사를 주름잡던 창업 1세대들이 가고 2, 3세 경영이 일반화된 요즘 1세대 경영인이 2세와 3세 경영인과 함께 호흡하는 보령은 그래서 남다른 주목을 받는다.

사람들은 김승호 명예회장을 종로5가를 약국 거리의 원조이자 발상지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기억한다. 한때 종로5가를 지나는 사람 중 열에 다섯은 보령약국 손님이라는 신화를 쓰며 약국과 도매상들이 하나둘 자리 잡으면서 김승호 명예회장은 종로5의 연관검색어가 됐다.

김승호 명예회장이 종로5가에 약국을 세운 건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남 보령 출신인 김 명예회장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큰형 김영제 씨가 고향에 대창약방을 열면서 약품에 대한 호기심을 처음 가졌다.

그리고 숭문중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유학와 사촌 형 집에 기거하게 되었는데, 사촌 형 김인호 씨도 그때 홍성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약방과 인연이 있었던 김승호 명예회장은 한국전쟁 때 학병으로 입대했다가 장교가 되지만 직업 군인의 길 대신 전역한다. 눈앞에 약국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전역한 김 명예회장은 곧바로 사촌 형의 홍성약방을 찾아가 약국 사업에 대한 의지를 키우다 1957101일 결국 일을 저지른다.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가까운 종로5가에 5평짜리 가게를 빌려 약국을 차린 거다.

약국 이름은 고향 보령에서 따왔는데, 그 의미도 그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보령을 한자로 쓰면 편안할 ()’자와 보호할 ()’자인데, 국민의 안녕을 보호한다는 제약보국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약국을 열었던 김승호 명예회장의 열정은 약국에서 숙식하는 그를 위해 아내 고 박민엽 여사가 매일 음식을 머리에 이고 약국까지 배달했다는 전설 같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으리라.

 

김승호 보령제약 명예회장.
김승호 보령제약 명예회장.

 

오로지 소비자 위한 서비스로 승부

 

사실 김승호 명예회장은 이렇듯 준비된 약국인이었던 터라 약국 경영에서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소매약국의 성공은 품질과 가격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시쳇말로 싸고 좋은 약으로 승부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도매상으로부터 공급받는 가격이라는 게 여느 약국이나 다를 바 없어 최소한의 이익만 붙인다고 하더라도 싸게 파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 명예회장이 구사한 전략은 외상 대신 현금거래를 원칙으로 하였다. 당시 업계는 외상 거래가 관행이었다. 소비자들에게 현금을 받고 약을 팔기에 당연히 현금 결제가 가능함에도 많은 약국은 외상을 택했다. 현금 거래로 자금회전에 숨통이 트인 제약회사들은 당연히 보령약국을 최우선, 최고 혜택의 거래처로 선정했다. 이렇게 하여 공급가를 낮출 수 있었던 김승호 명예회장은 기존 할인가보다 더 할인하면서도 약국의 이익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거다.

이것뿐이 아니다. 김 명예회장은 소비자가 찾는 약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다 주었다. 약국에 가서 찾는 약이 없으면 으레 다른 약국을 찾아가는 게 소비자들의 루틴인데, 김 명예회장은 소비자를 대신해 그 수고로움을 자처했다. 이는 소비자들로부터 보령약국에 가면 구할 수 없는 약이 없다는 신뢰를 쌓았고, 이왕 이 약국 저 약국 다니는 번거로움을 피해 아예 보령약국에서 약을 사는 게 편하고, 가격도 싸다는 확신까지 소비자들에게 심어줬다.

아울러 김 명예회장은 철저한 서비스 정신을 실천했다. 상표가 비뚤게 붙여진 제품은 절대로 팔지 않았다. 반듯함이 곧 약효라는 신념에서였다. 아무리 사소한 약품이라도 복용법이나 사용법, 부작용 등을 꼼꼼히 설명해 주었다. 약으로 인해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부작용을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였다.

또 김 명예회장은 약국 문도 여느 약국보다 항상 늦게 닫았다. 약국이 문 닫힌 후에 갑자기 병이 난 환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병원보다 더 역할이 컸던 약국을 생각하면 그는 늘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약국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이런 정신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보인다. 물론 물 아래에서 바삐 갈퀴질하는 오리처럼 그는 보이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노력을 해댔다는 점에서 성공이란 낱말 하나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

그는 늘 말한다. 사람들이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다. 성공한 기업이 아니라 성실한 기업인이다. 그의 이 말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

 

보령제약 최초 제품 오렌지 아스피린.
보령제약 최초 제품 오렌지 아스피린.

 

보령의 시그니처 제품, 용각산

 

개업한 지 3년쯤 되자 보령약국이 종로통에서 가장 큰 소매약국이 되자 김 명예회장은 19623월 준비된 모험을 감행한다. ‘보령약품이라는 이름으로 도매업에 뛰어든 것이다.

도매업이 소매업과 차원이 다르다는 건 경영 초보자도 아는 상식이지만 실제 경영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요구된다. 김 명예회장은 조직구조를 영업부·경리부·창고부의 세 부서로 나누는 한편, 약국 매장 내에 약품 진열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약품을 종류별로 구분했는데, 이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약품을 관리할 수 있었고, 고객들이 내부의 정돈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뢰와 호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당시로서는 독특한 진열 방식이 소문나자 견학하기 위해 약국 경영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도매상 역시 훈풍에 돛단 듯 나아가자 김승호 명예회장은 1964년 또 한 번의 도전을 감행한다. ‘보령제약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약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김 명예회장은 다짐했다. 제약인으로서 결코 장삿속으로만 약을 만들지는 않겠다. 많은 이의 질병을 낫게 하고 고통을 덜게 해줄 수 있는 제약인이 되겠다.

약국에서 제약회사가 된 보령제약의 첫 약품은 오렌지 아스피린이었다. 김 명예회장은 500밀리그램짜리 100개씩으로 포장돼 나오는 오렌지 아스피린을 보면서도 자신이 제약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 약 역시 성공했다. 1960년대 이름만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가정상비약이 되었다.

그리고 김 명예회장은 마침내 지금도 판매되는 첫 시그니처 제품을 내놓는다. 19662월에 나온 용각산이 그 주인공이다. 용각산 광고는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보령제약이 창업 이후 4년만에 성수동 공장에서 생산한 용각산.
보령제약이 창업 이후 4년만에 성수동 공장에서 생산한 용각산.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용각산은 미세한 분말의 순수 생약이기 때문입니다.”

용각산이 소비자들에게 사랑만 받은 건 아니다.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소비자 불만이 나왔었다. 사실 품질은 차이가 없었지만 외국산 선호 풍조 때문이었다. 이때 김승호 명예회장 모든 제품을 걷어 들이는 한편 일본 제품과 차이를 찾아 보완했다. 약품 자체보다는 포장 상태 즉, 알루미늄 용기와 상자의 질, 인쇄 상태가 일본 제품과 달랐던 거다. 그리고 나온 광고가 앞에서 인용한 거다.

 

주머니 속의 약체 위장약 겔포스 광고.
주머니 속의 약체 위장약 겔포스 광고.

 

그 사장의 그 직원정신으로 수해 극복

 

보령제약의 또 하나의 시그니처 제품은 뒤장약 겔포스. 겔포스는 프랑스의 비오테락스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1974년에 출시된 제품으로 여전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겔포스의 성공 신화 뒤에는 엄청난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 1977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바가 많았다. 30년 만의 폭우는 보령제약 안양공장을 잠기게 했다. 이제 막 출시해 소비자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한 겔포스 라인을 비롯하여 모든 고가의 최신 설비는 물론, 약품과 원료가 모두 진흙으로 덮이거나 흙탕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때 그 사장의 그 직원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누구 하나 시키지 않았는데도 직원들이 하나둘 공장으로 모여들었고, 옷을 입은 채 가슴까지 차는 물속을 헤집고 다니며 둥둥 떠다니는 제품을 바구니에 담았다. 먼저 물속을 헤집던 김 명예회장은 목이 메었다. 그는 물에 잠긴 책상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렇게 사자후를 토해냈다.

오늘 우리가 이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 문을 닫는다 해도 저는 행복합니다. 바로 이 진흙 속에 사우 여러분들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진 남은 모든 것을 다 팔더라도 여러분들이 구멍가게라도 열 수 있는 돈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다음의 진행 상황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짐작하는 바대로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한 중보 김승호 보령 명예회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한 중보 김승호 보령 명예회장.

 

만약 우리가 다시 일어선다면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멀리 갈 것입니다. 저 혼자 가면 빠를 수도 있지만 멀리 가지는 못할 겁니다. 비록 늦게 가더라도 언제나 함께 멀리 가겠습니다.”

이 말은 김승호 명예회장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심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1년은 족히 걸릴 거라던 예상을 깨고 보령제약은 4개월 만에 복구하여 공장을 정상 가동하였다.

이런 진심에 소비자들도 응답했다. “평생 용각산을 애용하는 소비자입니다. 부디 힘을 내십시오.”, “보령이 없어지면 제 쓰린 속(겔포스)을 어떡합니까?”

씨앗을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김승호 명예회장이 보령제약이라는 제약회사를 경영하며 창출한 신뢰가 다시 일어서게 했음임을 알 수 있다.

이후 보령제약은 신약 개발에도 적극 참여하여 국민의 건강을 챙기는 명실상부한 제약회사로 거듭나고 있다.

김승호 명예회장은 지난해 제약업계의 대표적 원로 모임인 팔진회(八進會)48년 동행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했다. 1975년 제약산업계의 발전을 도우면서 여덟 사람이 함께 나아가자는 뜻을 담아 만든 친목 모임 팔진회는 강신호 동아쏘시오홀딩스 회장과 보령 김승호 회장, 이종호 JW중외제약 명예회장, 윤원영 일동제약 회장, 유영식 옛 동신제약 회장, 지금은 고인이 된 윤영환 대웅제약 회장·어준선 안국약품 회장·허억 삼아제약 회장이 의기투합해 결성했다. 김 명예회장은 이 모임의 마지막 간사로서 이제 모임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 마무리하면서 남아있는 회비는 협회에서 좋은 곳에 써달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퇴진을 위한 것이었다.

보령제약 창업 60주년이 열린 신라호텔 기념식장에 들어서는 김승호 명예회장.
보령제약 창업 60주년이 열린 신라호텔 기념식장에 들어서는 김승호 명예회장.

 

기업가정신 연구가인 고승희 단국대 명예교수는 김승호 명예회장의 기업가정신을 4가지로 요약했다. 그리고 중보 정신이자 보령 정신라고 이름 붙였다. 중보는 김 명예회장의 호다. 신의성실, 공존공영, 도전정신 그리고 제약보국.

이제 보령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 새로운 도약도 결국 김 명예회장이 쌓은 보령 정신에서 기획되고, 실천하고, 그리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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