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가게 ‘다이소’를 모르는 사람 있나요?

박정부 아성다이소 회장.
박정부 아성다이소 회장.

 

[CEONEWS=조성일 기자] 전국 매장 1,500여 개, 32천여 종의 상품, 매일 100만 명의 고객 방문, 매출 3조 원. 이 신화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아마도 안 가 본 사람보다 가 본 사람이 더 많고, 안 가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간 사람이 없다는 1,000원짜리 국민 가게 다이소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다. 기자만 하더라도 외국에 사는 딸이 해외 배송으로 보내달라고 한 생활용품을 사기 위해 지난 주말에 다이소 매장을 다녀왔었다. 이런 다이소가 성공 신화를 쓰기까지는 창업자 박정부 회장의 경영철학을 비롯한 엄청난 서사가 그 역사 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

박정부 회장의 삶은 그 자체로 거대한 서사를 이루며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복음과 같이 다가간다. 행동 하나, 말 한마디라도 놓치면 큰 손해일 거 같다는 낭패감마저 들게 하는 박정부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의 마법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박정부 아성다이소 회장.
박정부 아성다이소 회장.

 

창업자는 정년이 없다

박정부 회장은 2022년 초 공동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올해로 그의 나이 팔십 살이니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면 그의 사임 이유를 절반만 맞힌 셈이다. 사실 박정부 회장은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실무를 다 챙길 수 없는 한계를 느껴 실무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대신 자신은 큰 틀에서 회사의 장기 전략을 구상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란다. 창업자는 정년이 없다고 말하는 박 회장은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도 이은 줄어들지 않다고 한다. 여전히 바삐 현장을 누비는 현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사임‘2선 후퇴라 쓰고 집중이라 읽을 수밖에 없으리라.

박정부 회장은 지금도 여전히 5시 반에 일어나 새벽 출근을 한다. 임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고요한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집중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바지런한 일과 시작을 위해 박 회장 어떤 일이 있어도 자정 전에 잠자리에 든다. 또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는 생각에서 일주일에 적도 3번 이상은 유산소 운동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특히 그는 한 달에 한두 번은 전국의 매장을 직접 돌며 직원들을 만난다. 그가 매장을 돌며 직원들을 만나는 건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풀리고 충전되기 때문이란다 그는 창업자인 자신을 대신해 주인처럼 맡은 임무를 해주는 직원들이 매우 고맙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매장 방문 때마다 꼭 하는 일이 있다. 모든 직원의 손을 직접 잡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물론 격려금도 곁들인다고.

 

박정부 회장이 쓴 자선 에세이집  《천원을 경영하라》 표지.
박정부 회장이 쓴 자선 에세이집 《천원을 경영하라》 표지.

박정부 회장의 삶 자체가 경영학 텍스트

박정부 회장은 2022년에 베스트셀러 1위를 찍은 천원을 경영하라(샘앤파커스 펴냄)라는 제목의 자전 에세이 집을 낸 바 있다. 이 책을 낼 때도 우리의 흥미를 끄는, 박 회장 특유의 경영철학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박 회장이 자기 삶과 경영에 관한 이야기를 쓴 건 2016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땐 그 원고를 책으로 묶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책상 서랍 속에 묵혔다. 그러다 2021년부터 어떻게든 이 원고를 묶어 책을 내보겠다는 생각에서 서랍에서 잠자던 원고를 꺼냈다. 그리고 주말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원고를 다시 읽으며 고쳤다.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그는 원고를 읽어가는 대목 대목마다 , 그때 내가 이렇게 했었지하며 추억을 떠올리곤 가슴이 먹먹해지며 울컥해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었다. 박정부 회장은 생각했다. 내 얘기를 내가 읽어도 감동위로가 느껴지므로 이를 다른 독자들과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출판을 결심했다.

그런데 일부 임직원들이 출판을 반대하고 나섰다. 경영철학은 물론이거니와, 경영비법 같은 것도 다 들어있으니 혹 회사의 비밀이 누출되는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박정부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런 말로 직원들을 설득했다. 경영에 관한 책을 많이 본다고 해서 경영의 달인이 되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원래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책은 세상에 나왔고, 출판가에 전설처럼 떠도는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말이 현실이 되도록 했다. 이 책이 나올 무렵인 연말연초에 불변의 베스트셀러 1위를 찍는 책이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쓴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본업에 충실해 연간지처럼 매년 내는 트렌드 코리아, 2023가 그 주인공이다. 이에 박 회장은 베스트셀러 차트 1위를 찍는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기록은 깨라고 있는 법임을 박 회장의 책은 입증했다. 그의 책 천원을 경영하라가 예스24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던 거다. 사람들은 다이소만큼이나 다이소를 창업한 박 회장의 삶과 경영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거다. 그의 삶은 경영학 텍스트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다이소 명동점 전경.
다이소 명동점 전경.

 

밥상 펴놓고 대기업 해외 연수 회사 창업

고객이 , 이게 진짜 1,000원이야?” 하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박정부 회장이 다이소를 창업한 건 1992년이다.

한양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박정부 회장은 1973년 서울 구로공단의 전구 생산 업체 풍우실업에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요즘 흔한 말로 흑수저도 아닌 무수저였던 그는 16년을 일했지만 돌아온 건 무능갈등이란 낱말이었다.

그는 생산 현장의 최적의 작업 조건과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48시간처럼 일했다. 이런 온몸을 다 바친 헌신은 입사 6개월 만에 동기들보다 먼저 계장으로 진급했고, 창사 이래 최연소 생산 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민주화의 진척에 따라 자연스럽게 현장 노동자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노조는 당연히 자신들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런데 그 불똥이 그에게로 튀었다. 노조의 활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는 무능한 간부가 되었고, 무능 낙인은 경영진과 갈등을 만들어냈고, 이로써 겪게 되는 모멸감 앞에서 박 회장은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박 회장은 뒷배가 있어서 그만둔 게 아니었던 터라 일본에 사는 동생의 사업을 거들 생각이었다. 이때 그는 절대로 가족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는 말을 가슴에 품었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고, 늦깎이 결혼이라 두 딸이 아직 어렸다. 한국전쟁 때인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가장의 부재가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박정부 회장은 이를 악물고 어머니 집에서 밥상을 펴놓고 창업했다.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일본 연수를 기획하는 사업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제가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일본은 인건비 때문에 대부분의 생활소품을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박 회장은 이거러 보고 가격이 합리적이면서 품질이 좋은 국내 상품을 일본에 팔면 어떨까 싶었고, 이 아이디어를 현실화해서 1988년 일본 100엔숍 등에 저가 생활용품을 수출하는 무역회사 한일맨파워를 설립한다.

창업 직후 발로 뛰고 배신당하고 하는, 성공 신화에 으레 등장하는, 진부하지만 결코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신화의 서사 대부분을 몸으로 겪으면서 박 회장은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다. 그러면서 그는 내 물건을 내가 팔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1992년에 탄생한 것이 아성산업(현 아성다이소)이고, 5년 뒤 1997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다이소 1호점을 열었다.

 

일본 기업으로 오해받았지만 한국 토종기업

박정부 회장의 회사 이름이 아성이 된 것은 어머니가 아시아에서 성공하라고 지어주신 이름에 따른 거였다. 그런데 1호점을 낼 땐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아스코이븐프라자로 정했었다. 하지만 이름이 어려워 납품처였던 일본 대창산업에서 지분 투자를 받으면서, ‘다이소란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대창산업을 일본어로 하면 다이소산교, 그들이 일본에서 운영하던 100엔숍 이름이 다이소였다.

사실 필요한 것은 다 있소란 의미에서 이 회사의 핵심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재밌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일본 이름 때문에 박정부 회장은 오해 아닌 오해를 받았다. 아성다이소는 박정부 회장이 손수 만든 토종 우리나라 브랜드다. 아성다이소는 다이소산교에 로열티를 단 한 푼이라고 지급한 적이 없다.

박정부 회장은 이름이 적잖은 걸림돌이란 생각에서 바꿀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유치원생도 기억할 만큼 쉬운 이름인데다 다이소에 익숙한 고객이 많아 바꾸지 않고 고민 중이란다. 또 일본 기업이란 비난의 빌미인 다이소산교의 지분도 깨끗이 정리해 100% 박정부 회사로 만들었다. 다이소산교에서 투자를 받았던 것도 거래 관계상 지속적 납품을 위한 고리를 만들기 위해 투자를 받아들였던 거다.

박정부 회장은 2013년부터 독도 후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2013다케시마 후원 기업에 아성다이소가 포함됐다는 어처구니없는 루머로 홍역을 치르면서 시작한 일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일본에선 역으로 다이소산교가 독도를 지원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일본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박 회장은 우리 오해는 우리가 풀 테니, 너희는 너희가 풀라고 했다고 한다.

 

지난해 3월 다이소 본사를 방문한 강수현 양주시장과 담소를 나누는 박정부 회장(사진 맨 오른쪽).
지난해 3월 다이소 본사를 방문한 강수현 양주시장과 담소를 나누는 박정부 회장(사진 맨 오른쪽).

 

싸고 좋은 물건으로 승부해야 한다

국민 가게 다이소의 상품 가격 기본은 1,000원이다. 요즘 돈 값어치로 보면 1,000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아니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산 게 비지떡이라는 우리의 인식과 맞물리면서 1,000원짜리 제품이 좋아야 얼마나 좋겠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박정부 회장은 균일가 사업은 마진을 쫓는 순간 망한다며, 값싼 상품을 찾아 이윤을 먼저 추구하기보다, 싸고 좋은 물건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 루미낙의 유리잔을 들여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화는 다이소에서 전설처럼 통한다.

유리제품 생산공정을 잘 알고 있었던 박 회장은 가동하지 않는 설비 활용과 상표를 노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윤이 날 만큼 대량 주문을 조건으로 내걸어 성사시켰다. 그렇게 들여온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상표를 숨겼던 게 오히려 소비자들에게는 좋은 이미지로 다가갔던 거다. ‘루미악이라는 걸 아는 순간 소비자의 신뢰는 쑥 올라가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다이소의 전 세계 거래처는 35개국 3600곳에 이른다. 소비자는 품질이 나쁘면 1,000원도 아깝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해서 박 회장은 싸고 좋은 물건으로 소비자 스스로 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전략이 주효했다.

그는 1년에 20회 이상 해외 출장을 다닌다. 그동안 다녔던 출장길을 얼추 따져보니 비행기 마일리지만 150만 마일에 달할 정도로, 지구 60바퀴 이상을 돈 셈이었다. 그는 아성다이소가 그를 위해서도, 직원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고객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그는 슬하에 딸이 둘이 있다. 큰딸은 3~4년 경영수업을 하다 나는 아빠만큼 못할 것 같다며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갔다. 대신 둘째 딸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 보는 앞에서 둘째 딸을 혼내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만 다른 곳에 가서 호되게 혼내지만 혼내는 건 한계가 있기에 스스로 느껴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무튼 오늘도 균일가 정책을 바이블로 여기는 박정부 회장은 이 정책을 언제까지 고수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고객에게 가격보다 더 큰 가치를 제공하고, 국민 가게, 국민 브랜드로서 국민 생활의 일부가 되려는 목표를 위해 뛰고 또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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