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운동실력·카리스마 겸비한 리더
박정희를 첫 눈에 사로 잡았지만 “난 부관 체질 아냐”

[CEONEWS=최재혁 기자] 2023년 12월을 뜨겁게 달군 전 대통령은 누구일까? 문재인-박근혜-이명박-노무현이 아닌, 전두환이라고 하면 당신은 믿을 것인가?

12·12 쿠데타를 소재로 사용한 영화 ‘서울의 봄’은 12월 22일 기준 900만 명을 넘기며, 악재가 겹친 한국영화계를 뒤흔들고 있다.

이들 관객 중 일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기개와 추진력에 박수를 치고, 다른 일부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나라의 근간을 엎었다는 데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이에 CEONEWS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쿠데타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살펴보며, 대한민국의 리더였던 사람은 어떤 존재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뛰어난 운동실력·카리스마 겸비한 리더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태생으로, 형제는 원래 6남 5녀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셋째 형 전기환과 본인, 그리고 남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뿐으로 총 3남 5녀이다.

4세 때인 1935년에 대구시로 가족이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때문에 경남 출신이지만 PK가 아니라 TK 계열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때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관련해서 대구공고와의 역사가 많다. 특기할 점이라면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해 고등학생 시절 대구의 학교들을 주먹으로 평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1951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4년제 정규육사의 첫 기수였기 때문에 입학 당시엔 육사 1기라는 명칭으로 입학했지만, 나중에 육군 수뇌부가 육군 초창기 장교들에 대한 예우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그전까지의 임시육사 기수들을 육사 1~10기로 쳐주기로 하고 정식 기수들을 부여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규육사 1기는 11기로 수정되어 밀려나는 바람에 11기생이 된 육사생도들이 격렬히 항의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이후로도 육사 11기생들의 임시육사 세대 선배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상호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나중에 11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탄생과 12.12 군사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운동 실력 및 강인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잘 이끄는 성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육사 동기들 중에서 조차 항상 리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같은 동기인데도 육사 시절부터 정호용과 김복동 정도를 제외하면 전두환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박정희를 첫 눈에 사로 잡았지만 “난 부관 체질 아냐”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육군 제25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첫 군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제21보병사단에서 근무한 뒤 1957년에서 1958년까지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을 거쳤다.

1959년 초에 미국 특수전 파견교육 장교로 선발되어 육군 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해서 1959년 4월에 수료했다. 1959년 5월에 육군 제1공수특전단[20] 본부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6월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의 미육군 특전단(그린베레)으로 군사유학을 가서 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 이 두 교육을 수료한 뒤 연말에 귀국했다.

이해 1959년 가을, 전두환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만남을 하게 된다. 전두환이 결혼 직후 그의 장인이자 육군본부 경리감 이규동 준장의 손에 이끌려,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을 만나러 간 것이다. 

이 당시 영등포 6관구 사령관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이규동이 6살 위였지만 둘 다 경북 출신으로 고령, 박정희는 선산 태생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규동 둘 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여 만주군으로 근무하였으며 육사 2기 동기이기도 했다.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절친의 사위이자 동향 후배인 전두환 중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자신의 부관이 되라 제안했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자신은 부관 체질이 못 된다”라고 거절하였다.

5.16 당시 전두환은 군이 아닌 서울대학교에서 ROTC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정변에 직접 참가하진 못했다. 다만 쿠데타 당일 날 아침 8시에 육군본부로 향해 상황을 파악하는 눈치 빠른 면모를 보였다. 

전두환은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알았을 뿐 아니라, 이 당시 박정희의 부관은 전두환의 오랜 친구인 육사 11기 동기 손영길이었기에 전두환은 어떻게든 쿠데타를 돕고자 했다. 

육사 생도들은 육사 선배인 전두환의 설득과 강압에 넘어가서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였고, 이는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그의 계급은 고작 대위, 나이도 겨우 30살이었다.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62년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역하고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몇몇 동기생들이 조직한 육군 내 사조직이 하나회로서 확립 되는 것도 이 시기이며, 전두환과 하나회는 군대 내부의 박정희 친위대를 표방하며 정권의 비호를 받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때 청와대의 경비가 부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박격포를 청와대에 설치했다. 그리고 이듬해 벌어진 1.21 사태 때 북한 김신조 일당이 서울로 침투하여 국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이었던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박격포로 많은 조명탄을 계속 쏘아 올려서 밝게 비추어, 김신조 일당의 소탕과 생포에 적잖은 역할을 한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된다.

1969년에 육사 동기들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한다.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 

이후 전두환은 1973년 1월에 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되었다. 이 장군 승진 시에는 박정희가 직접 외제차를 하사하였다.

마침내 전두환은 1974년 1월,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함께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976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됐고, 보안차장보직을 겸직하였다. 

이후 1977.2.1 전두환은 소장 진급하였다. 소장 2차보직으로 전두환은 1978년 1월 사단장 중 가장 요직인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는데 1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 1사단이 1978.10.17 똘이장군 제3땅굴 편의 배경이 되는 제3땅굴을 발견하며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어서 1979년 3월에는 요직인 국군보안사령관이 된다. 취임 시기에 일어난 부마항쟁에 있어선 강경진압을 계획하기도 했다.

쿠데타로 얻은 ‘대통령’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한 상황에서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10.26 사건 수사를 맡았고 수사 전권을 맡게되며 권력이 점차 전두환에게 쏠리기 시작했고 월권 행사로 정승화와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대통령 민주주의 선출을 정승화가 지지하고 빽인 박정희가 사라지며 하나회가 좌천되거나 숙청될 위기에 놓이자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보안사의 감청으로 정보우위에 섰고 북한때문에 최전방 군을 투입하는데 망설이던 진압군의 틈을 노려 계엄사령관이였던 정승화를 연행하였고, 이후 특전사령부도 제압, 노재현 국방장관도 확보한 뒤 유일하게 저항하던 장태완 수경사도 하나회에 합류한 신윤희에 의해 제압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비하나회와 하나회에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던 장교들을 하나하나 숙청한 뒤 하나회 출신을 꽂아넣으며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그를 임명할 때 차지철을 견제할 목적으로 노재현이 박정희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전두환을 천거한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안사령관인 그의 권력 순위를 짐작할만할 것이다. 

그는 보안사령관에 앉고 주어진 임무대로 차지철, 그리고 김재규를 견제할 각종 방안을 연구하였고 10.26 이후 그 방안들을 바탕으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상기한다면 유신 권력의 1인자와 두 2인자가 모두 사라진 이상, 두 2인자를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던 그가 부상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당시 전두환은 6인위원회를 구성하여 장성 진급을 결정하였다.

이후 그는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을 명분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진행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득표를 얻어 대통령직에 오른다. 

비릿된 욕망과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이 결합해 쿠데타를 진행했고, 그가 원한 국가 통수권자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말년과 역사적 평가도 원하는 대로 됐을까?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란’이라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성공한 걸까, 실패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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