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기 시사평론가
손진기 시사평론가

 

[CEONEWS=손진기 칼럼니스트] 12! 이제 2023년의 달력은 한 장 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 근현대사는 유독 12월에 주목한다. 칼바람의 혹한의 날씨에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촛불혁명의 물결도 12월이 한창이었으며 19대 대통령선거까지 12월에 치러졌었다. 1212 군사 쿠데타도 생일집 잔치란 작전명으로 대한민국의 군대를 송두리째 집어 삼켰다.

격동의 우리의 현대사도 12월의 혹한만큼이나 춥다.

군대 내의 사조직 하나회의 군 고급장교들은 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 사령관을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의 재가없이 불법 납치하였으며 무력 충돌로 인해 많은 아군이 희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명단이나 희생자 숫자조차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212일 당일 소위 신군부라 칭하는 육군 내부의 반란 세력들은 무력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고 대한민국의 국방을 책임지는 국방부장관은 총소리에 놀라 가족과 함께 피난을 해 장시간 행방불명이 되었다. 결국 국방부장관의 소재파악 불가,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 사령관 납치라는 국가 방위 공백상태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 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놀랐고, 신군부에 대항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던 장태완 장군과 전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은 연희동 요정에 묶어 놓는 치밀함까지 작전에 포함시켰던 신군부!

대통령의 재가가 이루어지지 않자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신군부 장성들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몰려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동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대한민국 국군역사상 초유의 군 장성 집단 항명, 대통령 협박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한다. 그리고 역사가 기억하도록 재가한 날자와 시간을 결재서류 밑에 써놓는다. 사후 재가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끝까지 군의 정당성과 반란군을 제압해야 한다는 군인정신으로 대항했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육본 헌병감 김진기 장군 등은 반란 쿠데타 세력에 끝까지 대항하지만 9공수의 회군으로 결정적인 실책을 하면서 실패하고 체포된다.

참 군인들이였다. 군인의 본분을 지켜 끝까지 참 군인이였던 그들이 숭고한 군인정신과 목숨 건 그들의 용맹에 고개를 숙인다.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위해 이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후에 역사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고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를 척결했으며 사면과 복권 재판, 청문회 등을 통하여 역사를 바로 잡으려 노력 해왔다.

그러나.......

당시에 이유도 모르고 전우를 서로 총질하여 죽이고 친구를 총으로 쏴야 했던 그들의 희생은 왜 조명 되지 않는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지키다 희생된 장병,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다 가장 친한 선배 손에 사살당한 김오랑 소령. 부하의 죽엄앞에 참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병주 사령관 또 그들의 가족들....

왜 우리는 불법 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등의 소위 나쁜 놈들은 기억 하면서 의로운 참 군인들은 기억 하지 못하고 기리지도 않는가!!

역사는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반란군보다도 더 기억해야 하지 않는가?

장태완 장군의 아버지는

내 아들이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승리한 역적들이 충신을 살려둘 리가 있겠느냐?” 그 후 곡기를 끊은 아버지는 19804월에 끝내 숨을 거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장태완 장군은 진달래가 붉게 핀 왜관 낙동 강변 동산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통곡했다.

아버지, 쿠데타가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십시오. 저는 극악무도한 저 역도들의 죄악을 밝혀내고 명예를 회복 한 후에 아버지 곁으로 가겠습니다장테완 장군의 말이다.

두 자녀가 있었다. 딸은 이화여대에 다니고 있었고 아들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묵묵히 공부하여 서울대에 합격했다. 그해 아들은 겨울여행을 다녀 오겠다고 집을 나가 할아버지 묘소에 성묘하고 할아버지 묘를 껴안고 자살했다.

아버지, 제가 죽어서라도 이 눈으로 아버지를 망하게 한 악인들의 심판을 볼 거예요. 죽어 귀신이 돼서라도 입을 열어 저들의 죄악을 하늘에 고발할 겁니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입을 벌리고 뜬 눈으로 죽어 있었다. 장태완 장군은 아무리 아들의 입과 눈을 감겨주려 해도 감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기를 끝까지 지켜주었던 김오랑 소령의 모쇼에 참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언으로 자녀들에게 내가 죽어도 김오랑 소령의 묘소와 그 가족들을 살피라고 전했다.

김오랑 소령은 가장 친한 이웃집 육사 선배에게 사살 당했다. 그의 부인백영옥 여사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완전 실명했다. 이후 매달 30만원(당시 대기업 사원 월급 수준)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리고 1991628일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자비원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밖에도 우리는 수많은 의인들의 사연들.....우리는 모른다.

왜 우리는 악인들을 더 기억해야하는가

우리 역사는 이들을 더 기억해야 한다.

서울의 봄은 실패 하였으나 영화는 성공 했다. 한 번씩 꼭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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