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CEO 추모-회장님! 그립습니다] 삼성 창업주 겸 초대회장 호암 이병철 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겸 초대회장. (사진=삼성그룹)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겸 초대회장. (사진=삼성그룹)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事業報國)에 있다는 신념에도 흔들림이 없다.” (1976년 11월 ‘나의 경영론’(전경련회보)에서)

호암 이병철은 삼성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이다. 대한민국 전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주역이다. 삼성물산, 제일제당을 시작으로 많은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에 큰 업적과 교훈을 남겼다. 이병철의 성공법칙은 첫째, 경청하라!, 둘째, 적자생존? 적는 자 생존!, 셋째, 아이디어, 꼬리에 꼬리를 물어라!, 넷째, 미래를 읽는 독서 습관을 길러라!, 다섯째,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라!, 여섯째, 헛된 경험은 단 1초도 없다!, 일곱째, 사람을 믿지 못하면 쓰지를 말고 썼으면 믿고 맡겨라!, 여덟째, 나아갈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구분하라!, 아홉째, 뇌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라! 가 있다. 하나하나 보석 같은 성공법칙임에 틀림없다. 1987년 11월 19일 별세. 올해 36주기다. 회장님! 그립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첫사업 아이템은 ‘쌀’이었다. 경남 일대 농산물 최대 집산지인 마산의 도정능력 부족에 착안해 정미사업을 벌인다. 일본인 상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동업자 둘을 더 모아 ‘협동정미소’라는 상호로 출발했으나 1년 뒤 자본금의 3분의 2가 잠식된다. 이병철은 미곡의 수급에 집중한 나머지 단순히 쌀값이 오를 때 군중심리에 따라 사고 내릴 때 따라 판 것이 문제였다는 걸 깨닫고 거꾸로 쌀의 시세가 올라갈 때 팔고 내려갈 때 사는 방식을 택한다. 그때부터 정미소는 이익을 내기 시작해 흑자경영을 하게 된다. 실수 앞에 좌절하지 않고 원인을 분석하여 만든 결과였다.

사업확장을 벌이다 찾아온 실패

1936년 8월 이병철은 매물로 나온 ‘마산 일출 자동차회사’를 인수하여 운송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한다. 당시 마산에서는 물자 운송수단이 부족해 운임이 비싸 운송사업이 경쟁력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상은 적중하여 이병철은 정미와 운수 두 가지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는 토지 사업에 뛰어든다. 토지를 담보로 은행융자를 받아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한지 1년 만에 200만 평의 대지주가 된다. 그러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은행의 대출이 중단되고 토지시세는 폭락했다. 이병철은 모든 전답과 정미소, 운수회사를 처분하고 부채를 청산하고 나니 수중에 전답 10만평과 현금 2만원이 남는다.

사업의 철학에 눈 뜨며 신화의 씨를 뿌리다

이병철은 토지 투자 사업 실패에도 새 출발을 위한 사업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부산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여러 도시를 둘러보고 중국으로 넘어가 베이징, 상하이 같은 도시를 돌며 사업계획을 구상한다. 여행 끝에 그는 청과물 건어물, 잡화 등의 무역을 하기로 결정한다. 일상에 필요하지만 아직 전문화된 업자들이 없어 도전할 만한 사업이라 판단했다. 1938년 3월 1일 경북 대구 서문시장 근처 수동에서 250평 규모의 점포, 삼성상회를 개점했다. ‘삼’의 三은 큰 것, 많은 것,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숫자고, ‘성’의 星은 밝고 영원히 깨끗이 빛난다는 뜻으로,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삼성상회는 청과류와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까지 수출하며 사세를 늘려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생산시설 설립

1953년 전쟁이 끝난 후 이병철은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가공, 생산시설을 갖춘 제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생활필수품을 국내생산하여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인 공급을 도모하는 한편, 일자리를 만들고 기술의 축적과 산업활동의 확대에 기여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시기상조라는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제조업 투자를 결심한 그는 제당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국내 설탕생산은 전무해 전량 수입에 의존하여 국내가격이 세계시장 가격의 3배나 되는 비싼 값에 거래돼 국민들은 큰 불편을 겪고 있었다. 이병철은 1953년 8월 1일 부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생산시설을 갖춘 ‘제일제당공업(현 제일제당)’을 설립하고 그 해 6,300kg의 설탕 시제품을 생산에 성공하였다. 설탕 수입의존도 100%였던 우리나라를 창립 3년만인 1956년에 7%까지 떨어뜨리는 쾌거를 이루며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한다.

국민들의 의(衣), 식(食) 수준을 향상 시킨 기업인

제당사업으로 국민들의 식(食)생활 수준을 끌어올린 이병철은 의(衣)생활에 눈을 돌려 모직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하고 1954년 9월 15일 제일모직을 설립한다. 당시 양복이라고는 미군 군복을 염색하던 수준이었고 마카오에서 수입한 천으로 만든 이른바 마카오 양복은 근로소득자의 세 달치 급여보다도 비쌌다. 우리 국민 모두 손쉽게 값싸고 질 좋은 양복을 입었으면 하는 것이 이병철의 소망이었다. 400년 전통의 영국모직과 경쟁한다는 발상이 어리석다는 등 주변의 부정적인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국제적으로 영국제와 견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최신시설의 대규모 공장을 대구에 건설했다. 해외 기술도입과 연구개발을 통한 품질 향상을 이뤄낸 제일모직은 국내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고 영국제와 일본제 등으로부터의 수입대체를 이뤄냈으며, 1960년대부터는 수출입국에 기여하였다.

생애 단 한번의 공직.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 초대회장

이병철은 정부로부터 국가재건을 위해 경제인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줄 것을 요청 받아, 1961년 8월 16일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의 초대회장직을 맡는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의 적은 자본과 낮은 기술력이라는 한계를 극복해내기 위해 국내외를 뛰어다니며 많은 경제인들을 만나 재정과 기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이병철은 울산공업단지에 기간산업들을 건설하고, 과감하게 외자를 유치하자고 정부에 건의하였고 실제로 받아들여졌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공업단지라는 개념을 정립해 공장들을 유기적으로 모아 운영하는 것이 보다 경제적이며 외국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데도 유리하다고 이병철은 판단했다. 건설 후보지 답사를 통하여 울산이 선박 입항에 유리한 잔잔한 항만과 태화강 용수 등을 갖추어 건설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경제인엽회 회장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직이었다.

전자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정하다

1960년대 후반, ‘전자산업’ 진출이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단계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이병철은, TV, 냉장고 등 가전분야로 시작하여 기반을 굳힌 다음 컴퓨터 등 산업용 분야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게 된다. 창립 9년 만인 1978년 흑백텔레비전 200만대를 생산해 연간 생산량에서 세계 최고기록을 수립하고, 1984년에는 국내 최초로 컬러텔레비전 500만대 생산을 돌파했다. 이후 반도체, 컴퓨터 등 산업용 제품개발에도 주력하여 꾸준한 기술의 성장을 통해 세계적인 전자기업으로 공고히 서게 된다.

반도체 사업, 일렉트로닉스 혁명을 일으키다

1982년 73세의 이병철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고민하다 ‘반도체 개발’을 결심한다. 선진국들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저가제품·대량수출이란 기존 무역방식은 이젠 한계에 와 있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 개발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그해 3월 보스턴 대학에서 경영학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오른 미국 방문길에서 IBM, 제너럴일렉트릭 등의 반도체공장을 둘러보고 반도체가 빠르게 핵심산업으로 부상하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반도체 생산을 통한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변신을 도모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귀국 후 이병철은 반도체공장 부지선정 작업에 착수하고 시장조사와 인재확보에 나섰다. 실리콘밸리에 현지법인을 설립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메모리반도체 연구개발을 진행하여 1983년 11월, 삼성 개발팀은 마침내 양질의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였다. 대한민국의 ‘일렉트로닉스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문화예술 지원과 나눔의 실천

이병철 회장은 기업경영 이외의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들을 모색했다. 그는 1965년 10억원 상당의 주식과 33만여 제곱미터의 부동산을 기금으로 출연해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6년 후 1971년에는 개인재산 3분의1을 기금으로 추가 출연하였다. 재단 해산 시 재산은 국가에 귀속한다는 조항을 규정해 재단재산의 사사로운 사용을 막았다. 이는 ‘인간의 행복이 물질에 있지 않다’는 이회장의 평소 가치관의 실현이었다. 삼성문화재단은 설립 이래 지금까지 ‘문화 한국의 위상을 정립하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다’는 미션 아래 밝고 건강한 사회 발전을 위해 미술관 운영, 문화예술 지원, 장학사업 등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참고자료

1. 대한민국을 바꾼 경제거인 시리즈2 이병철처럼-반도체 신화를 넘어 위대한 대한민국으로. 박시온 지음, 손병두 감수, FKI미디어. 2012.

2. 전경련 디지털기업인박물관 삼성그룹 창업주 겸 초대회장 호암 이병철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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