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CEO 추모-회장님! 그립습니다]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 편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 (사진=전경련)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 (사진=전경련)

 

[CEONEWS=박세영 기자] “경영인은 건전한 기업가정신을 가져야 한다. 기업은 이익이 우선이긴 하지만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는 정신자세가 필요하다. 즉 최고경영자가 자신이 하는 일이 국가에 도움을 주고 국가발전 성취에 이바지하는 것인가를 올바로 생각한다면, 설혹 하는 일에 있어 일시적인 패배가 있을지라도 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1985.1.11. 사장단 세미나에서)

2월 8일 HD현대는 지난해 말 입주한 분당 신사옥 글로벌R&D센터(GRC) 내부를 공개했다. GRC의 정체성은 1층 정면 현관에 위치해 정주영 창업자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벽’이나, 4층 로비층 대형 스크린에 떠오르는 창업자의 어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정주영 창업주의 영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정주영 창업주는 2001년 3월 21일 별세. 향년 86세. 올해 22주기다. 정주영 창업주는 창의적 상상력이 가지는 무궁한 가능성에 대한 신봉자였다. 20세기 세계 어느 선진국의 저명한 기업가들과 비교해도 가장 빛나는 자랑스러운 선각자라 할 수 있다. 소떼 몰고 방북한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 위에 고속도로, 발전소, 댐, 도시를 건설했으며, 세계로 수출하는 자동차를 만들었고, 조선소를 세워 조선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주영은 기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 “기적은 종교에서 가능한 일이요, 기업경영에서는 오직 신념, 도전 그리고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남들이 기적이라 불렀지만, 그는 평생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정주영 성공법칙은 첫째, 남과 다르게 생각하라! 둘째, 도전하라, 시련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라! 셋째, 긍정의 힘을 믿어라! 넷째, 돈은 가치 있는 곳에 써라! 다섯째, 글로벌 기업가가 되려면 ‘코리아’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하라! 여섯째, 꿈을 진화시켜라! 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쌀집 종업원에서 가게 사장으로

정주영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1915년 11월 25일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세 때 경성으로 상경, 공사장 막노동, 공장의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쌀가게 복흥상회에서 배달원 일을 시작했다. 정주영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취직한지 6개월 만에 장부정리까지 맡았다. 복흥상회 주인은 자신의 가게를 인수할 것을 제안했고 정주영은 이를 물려받아 1938년 1월 ‘경일상회’를 설립했다.

기술보국의 시작. 현대자동차공업사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 (사진=전경련)
현대가 처음 만든 자동차 '포니'. (사진=전경련)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던 정주영은 서울 아현동의 ‘아도서비스(Art Service)’라는 정비공장을 인수해 자동차정비업을 시작했다. 1943년 일본의 ‘기업 정리령’으로 강제합병을 당했다. 광복 후 정주영은 귀속재산불하 조치로 대지 200평을 불하 받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상호로 정비업을 재개했다. 현대를 지향하며 발전된 미래를 만들어보자는 정주영의 소망을 담은 ‘현대(現代)’의 시작이었다.

현대건설 설립. 잔디 대신 보리로 고정관념을 깨다

정주영은 1947년 5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여 건설업에 진출한다. 1950년 1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1952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에 맞춰 현대건설은 미군으로부터 ‘유엔군 묘지를 푸른 잔디로 덮어줄 것’을 주문 받았다. 정주영은 겨울에 자라기 어려운 잔디 대신 ‘푸른 보리’를 사용해 묘지를 녹색으로 만들어 성공적으로 공사를 완료하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신용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 완공

1953년 한국전쟁 후 맡았던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는 건설장비의 부족, 물가폭등, 교각이 급류에 휩쓸리는 사고 등으로 난항을 겪었다. 주변에서 공사중단을 권유하였으나 정주영은 ‘신용의 중요성’을 외치며 동생과 매제의 집까지 팔고 막대한 사채를 끌어다 공사에 쏟아부어 1955년 끝내 완공시켰다. 이는 정부로부터 현대건설의 신용을 높게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시련의 경험을 기회로…경부고속도로 완공

정주영은 국내건설 경험을 토대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몇 번의 실패 끝에 1965년 태국 정부가 발주한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을 수주했다. 대한민국 건설사 최초의 해외진출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공사를 완공했다. 1968년 2월 428km에 이르는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됐다. 국내 16개 건설사 중 현대건설이 30%에 해당하는 구간을 맡아 주도적으로 공사에 참여했다.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 3.76%에 불과한 낮은 이익률을 남겼다.

500원 지폐 속 거북선으로 조선소 건설 차관을 얻다

정주영은 조선업은 위험부담은 크지만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며 사업에 진출했다. 1971년 선박 컨설턴트 회사 A&P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정주영은 지갑속에서 거북선이 그려진 당시의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다”며 설득했다. 이에 감동받은 롱바텀 회장의 도움으로 차관을 이끌어냈다. 아직 조선소도 짓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의 선박왕 조지 라바노스를 찾아가 유조선 2척의 수주계약을 따낸다. 정주영은 1972년 조선소를 건설하는 동시에 육지에서 선박을 함께 만드는 세계 최초의 작업을 시작해 2년 후인 1974년 2월에 조선소 준공식과 선박을 선주에게 넘기는 명명식이 같은 날 동시에 치르는 신화를 이뤄냈다.

"자동차는 혈관속의 피와 같다" 포니 자동차 출시

1974년 현대자동차는 연간 5만6000대 생산규모의 자동차공장을 짓기 시작한다. 당시 국내 승용차 수가 총 10만대였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정주영은 “자동차를 완벽하게 생산하는 나라는 항공기든 뭐든 완벽한 생산이 가능한 나라” 라며 국내 독자개발을 추진했다. 마침내 1976년 90%의 국산화율을 달성하며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한 이름인 포니(pony)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로 자동차 독자 생산가능 국가가 됐다.

1977년 아산의 이름으로 '아산재단' 설립

1977년 정주영은 자신의 현대건설 주식 절반을 출연해 아산재단을 설립했다. 이는 500억원에 달하는 규모로 당시 우리나라 연간 사회복지예산인 195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본인의 신념을 실현한 것이다.

서산 간척사업, 한국 지도를 새롭게 그리다

현대그룹 창업주 아사 정주영. (사진=정경련)
현대그룹 창업주 아사 정주영. (사진=정경련)

 

정주영은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는 간척사업을 통해 단 한 뼘이라도 땅을 넓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척사업은 기업이 하기에는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었음에도 정주영은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한번 만들어진 땅은 영원한 생산의 원천이 된다며 서산 간척사업에 도전했다. 정주영은 이를 대신해 울산조선소에 있는 폐선을 방조제로 활용하여 조수를 막아놓고 현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이나 블록으로 물을 막는 전대미문의 공법을 아이디어로 냈으며, 6개월의 검토 끝에 공사비 절감과 충분한 안전성이 확보된 것으로 결론이 난다. 1984년 2월 25일 수많은 관계자들이 보는 앞에서 유조선을 이용해 끝막이를 하는 일명 ‘정주영 공법’은 성공을 거두며 약 4,700만 평의 바다가 대규모 농지로 변화하며 대한민국 지도가 새롭게 그려졌다.

“경제는 민간이 주도해야” 재계의 대표 전경련 회장 추대

정주영 회장은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제13대~17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10년 동안 재계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정회장은 국내 최초의 민간경제연구소인 한국경제연구원을 설립(1981)하는 한편, 기업의 장기자금 조달 지원을 위한 대형 민간은행인 한미은행을 창립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 “88서울올림픽 유치”

1981년 4월 정주영은 전경련 회장으로서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돼 자금조달능력, 기반시설, 국제스포츠계 인맥 등 대한민국보다 월등히 앞선 일본 나고야 유치단과 경쟁해야 했다. 정주영은 한국 유치단을 이끌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리는 서독의 바덴바덴으로 건너갔다. IOC 위원들과 별다른 친분이 없었던 그는 매일 밤 대표단 회의를 열어 표를 점검하고 IOC 위원들의 개인적 연고를 찾아내 유치전략을 세우며 고군분투하였다. 정주영은 84명의 IOC위원들의 숙소에 일일이 정성을 들인 꽃바구니를 보냈는데 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급시계를 선물한 일본보다 공개적인 감사인사를 받아내는데 주효했다. 1981년 9월 30일 IOC 총회에서 울린 “쎄울!”이라는 외침과 함께 한국 유치단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참고자료

1. 대한민국을 바꾼 경제거인 시리즈1 정주영처럼-빈곤과 굶주림의 나라에서 선진 산업국으로, 박시온 지음, 박정웅 감수, FKI미디어. 2012.

2. 전경련 디지털기업인박물관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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