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없었던 읽으면 보이는 여행

[CEONEWS=김관수 기자] 한 여행사의 강화도 당일치기 투어를 다녀왔다. '천자심행', 천자는 흔히 알고 있는 천자문이다. 지난 12월 강화에 문을 연 심은 천자문서예관에서 서예의 예술성과 무한한 세계에 놀랐다. 심(沁)은 강화도의 옛 지명으로 강화의 명소를 다니며 문자를 찾아 이야기들을 듣는 여행이다. 읽으면 보이고, 보면 알게 되는 강화도 여행이다.

전등사를 조금 더 깊이 만나다

천자심행의 첫 코스로 찾은 천년고찰 전등사는 경내에 하얀 눈꽃을 피우고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마침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쾌청하다. 이쯤 되면 제대로 복 받은 날 아닌가. 산사의 포근한 겨울 풍경과 함께 곳곳에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보기 딱 좋은 날씨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정족산성은 한민족의 시조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삼랑성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정족산성이라는 이름보다는 삼랑성이라는 이름에 피가 더 당긴다. 왠지 더 신성한 느낌과 함께 중국식 딱딱한 한자가 아닌 한국적인 이름의 부드러움에 마음을 내어주고 싶다.

삼랑성 안에는 역사적으로 매우 비중 있는 유적들이 다양하게 남아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몇 가지만 살펴보면, 고구려 소수림왕 시기에 건립된 전등사를 비롯해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 병인양요 당신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 군대를 격퇴한 것을 기념하는 양헌수승전비가 남아있고, 과거 고려 시대의 임시 궁궐인 가궐이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시대에서 대한제국까지 거의 모든 시대의 역사가 남아있는 현장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삼랑성 남문을 통과해서 언덕을 조금 더 오르면 곧 전등사가 모습을 보인다. 전등사는 예나 지금이나 규모가 큰 대사찰이다. 조선불교 31본산 중 제4본산으로 강화, 김포, 교하, 장단, 개성, 풍덕, 고양 등에 34개의 말사를 거느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등사 내부에도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을 비롯한 역사가 깊은 건물부터 서역인의 얼굴을 한 목불까지. 마치 보물섬에 툭 떨어진 것만 같다. 

천자심행을 통해 처음 접해 본 글은 대웅보전의 주련이다. 사찰이나 옛 고택의 기둥에 쓴 글귀들을 말하는 주련은 그 집의 정체성이나 주인장의 철학 등을 담은 글귀들이다. 대체로 주련이 한자로 되어 있어 그 뜻을 알고 가기 힘들지만, 전등사의 주련 아래에는 친절한 한글 해석이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은 온 세상에 두루 계시며​

月印千江一體同 월인천강일체동
천 개의 강에 달그림자 비춤이 모두 같고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사지에 원만히 밝으신 모든 성인들이

賁臨法會利群生 분림법회이군생
법회에 왕림하시어 모든 중생 이롭게 하시네

종종 절집에 가면 현판을 어느 분이 쓰셨다는 얘기를 듣는다. 집의 간판이니 그 중요성은 말해 뭐할까. 글씨 잘 쓰는 명필의 글씨를 갖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집주인의 마음. 전등사 현판은 글씨와 그림이 함께 공존한다.

해강 김규진 선생이 글씨를 쓰고, 죽농 안순환 선생이 그림을 그렸다. 두 거장의 콜라보! 그들은 조선불교 31본산 사찰현판을 모두 이런 형식으로 함께 제작했다고 한다. 몇 번 전등사에 발걸음을 했었지만, 꼼꼼하게 글자들을 살펴보니 흥미로운 지식이 훨씬 많아졌다. 천자심행이 여행자를 부자로 만든다.

심은 천자문서예관, 서예의 예술성과 미래를 발견하다

흔히 추사라고 부르는 완당 김정희 선생은 추사체를 세상에 남기며 한자의 종주국 중국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그 이유는 3500년 중국 서법 역사에서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서체의 독창성과 창의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그 기묘함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공존 했었지만, 후세에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한반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서예가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고 있다.

이 시대 서예계의 원로로 꼽히는 심은 전정우 선생은 강화도가 고향으로 20년간 운영하던 심은미술관에 이어 2022년 12월 심은 천자문서예관의 문을 새롭게 열었다. 옛 강후초등학교가 폐교된 후 이 학교 1회 졸업생인 선생이 임대하여 미술관으로 운영해왔고, 이 미술관이 있는 이강2리마을은 천자문 마을로 명명됐다.

전정우 선생의 호 ‘심은’ 역시 강화도와 연관이 있다. 과거 강화는 섬이 물에 적셔져 있다는 의미로 ‘심도’라고 불렸고, 그의 호 ‘심은’은 강화도에 은거하는 사람, 강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서예는 5서체(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를 얘기하지만, 심은 선생은 무려 129가지의 서체로 천자문을 써왔다. 갑골문자에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심은체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세상에 없었던, 자전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서체들을 연구하고 개발해왔다.

지금까지 129개의 서체로 형태와 크기가 서로 다른 여러 종이 위에 써온 작품이 대략 1,150점에 이른다. 서예에 문외한이더라도 잠시 떠올려 보면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는 숫자들이다.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완벽한 해석을 통해 창의로 빚어낸 문자의 예술기행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광대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 바로 강화의 심은 천자문서예관이다. 1, 2층의 전시 공간 안에 지금까지 이뤄낸 결실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지만, 작품 수에 비해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공간이 그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전등사, 강화성공회성당 등 천자심행의 여느 코스들은 주련 등의 글귀를 통해 옛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스인 반면, 천자문서예관은 서예의 예술적 가치와 한 대가의 무궁무진한 문자 세상을 만나 볼 수 있는 오로지 천자심행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세상에 둘 도 없는 여행코스다.

심은 선생의 작업실과 전시실이 함께 있는 천자문서예관은 개인적으로 만든 사설전시관으로 플래닛월드투어의 강화 천자심행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심은 선생의 예술 세계를 조금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다. 강화도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추사도 놀랄만한 우리 시대의 추사를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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