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 이재명...법학과 입학
잇따른 선거 패배에서 ‘대통령 직전’까지

이재명 당시 대선후보가 대선에 나서 손을 높이 치들었다(사진=이재명 의원실)
이재명 당시 대선후보가 대선에 나서 손을 높이 치들었다(사진=이재명 의원실)

[CEONEWS=최재혁 기자] 2022년 내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두 인물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아닐까. 두 사람 모두 나름의 승승장구를 이어오며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숱한 그들의 과거 문제와 대선 기간 생겨난 의혹과 파문으로 ‘비호감 선거’라는 말까지 생산해냈다. 두 사람은 생각했을 것이다. ‘선거에서 이기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둘 다 승리자가 될 수는 없었다. 패배한 이재명 의원은 선거 패배의 원인과 책임자로 손가락질 당하며 자신의 힘과 지위를 서서히 잃어갔다. 그런데도 그는 ‘오뚝이’처럼 딛고 일어서며, 마침내 ‘당 대표’를 손에 거머쥘 듯하다.

어린 시절의 이재명(사진=이재명 의원실)
어린 시절의 이재명(사진=이재명 의원실)

‘소년공’ 이재명...법학과 입학까지

1963년 경북 안동에서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 의원은, 아버지의 거듭된 노름으로 어머니 홀로 많은 식구의 생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당시 시골에서 여인 혼자 돈을 벌어봤자 얼마나 벌 수 있었겠는가. 이 의원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시점에 경기도 성남시로 함께 이사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남들처럼 중학교에 진학해야 했던 이 의원은 성남 상대원 공단의 공장에서 소년공으로 진학했다.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그였지만, 아버지가 생계를 이유로 거부했다. 

이 의원의 첫 직장은 염산과 황동을 다루는 목걸이 공장, 2번째는 붕산으로 땜을 하는 공장이었는데 사장의 야반도주로 월급을 떼였다. 3번째 공장에서는 고무 조각이 손가락에 박혔는데, 파편이 지금까지도 박혀 있을 정도였다. 4번째 직장에서는 날카로운 함석에 찔려 손 전체에 흉터가 많다. 당시 공장의 분위기에 따라 작업반장의 구타로 인해 난청과 부분적 청각 장애도 얻었다.

이후에도 소년공 이재명은 자신이 일할 수 있는, 제대로 돈을 줄 수 있는 공장을 찾아다닌다. 그러던 중 글러브 공장에서 프레스에 왼쪽 손목 바깥쪽이 끼어 손목 관절이 으깨지는 골절을 입었다. 당시만 해도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본격적인 치료는 받지 않았지만, 후에 장애 6급 판정받았다. 이에 따라 군대는 면제됐다.

암울한 시기를 보낸 17살의 그는 우울증과 장애로 자살을 시도한다. 연탄 불을 피우기도 하고, 다량의 수면제를 투약하려 했지만, 주변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났다.

이 무렵 소년공으로 지내면서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합격한 그는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준비한다. 소년공으로서 생계를 담당한 가장과 동시에 대학 입학을 도전하는 수험생까지 두 책임을 모두 짊어지며, 그는 결국 1982년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한다.

어머니와 함께한 중앙대학교 입학식(사진=이재명 의원실)
어머니와 함께한 중앙대학교 입학식(사진=이재명 의원실)

사법시험 합격 후 ‘정치 도전’

이 의원은 법학과 선배들에게 사법시험에 관해 들으며 꿈을 키워나갔다. 장애인이라 취업이 힘든 자신에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이유였다. 그는 1986년 제28회 무사히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그의 인생에 몇 개의 터닝 포인트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1987년 사법연수원생 시절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이었다. 그를 보며 ‘굳이 판검사를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구나’라고 느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호승심에 군부 정권에 반대하는 뜻으로, 연수원생 신분에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반대 연판장을 돌렸다. 이후 그는 당시에 대해 “잘릴 각오로 썼는데 잘리지 않아 다행”이라며 놀란 가슴을 내려앉혔다.

이 의원은 끝내 “나는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주변에 홍보했고, 결국 변호사 겸 성남 지역 시민운동가로 활동한다.

그의 또 다른 터닝 포인트는 바로 2004년에 있었던 성남시 공공 의료원 설립이다.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성남시민들은 공공 의료원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국내 최초로 18,595명의 서명으로 주민발의 조례했다. 2시간의 논의 끝에 지방자치법, ‘지방공기업법(타당성 검토여부 등)’과 의료 제반 여건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다시 심의하기로 하여 '심사보류'로 결정됐다.

힘을 잃지 않고 성남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이 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를 즈음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단수 공천으로 성남시장 후보로 출마한다. 결과는 보수 성향이던 성남시였기에 당연히 낙선한다.

이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경선에서 공천 탈락한다. 대신 성남시 분당구 갑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현역 의원에 밀려 낙선하고 만다.

제6회 지선 당시 이재명의 포스터(사진=이재명 의원실)
제6회 지선 당시 이재명의 포스터(사진=이재명 의원실)

성남시장에서 ‘대통령 출마’까지

다행히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해 51.2%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된다. 

시장이 된 직후 화제가 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시 재정 건전화에 착수했으며, 한편으로 공무원들의 매관매직 인사 관행을 개선한다.

2010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성남시의 긴축 재정을 조정하여 지방채 발행, 회계 내 재산을 매각하여 2013년 모라토리엄 종결을 선언했다. 이를 통해 이재명 의원은 ‘능력 있는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성남시장 재임 시절인 2016년에는 ▲청년배당 ▲무상 산후조리 ▲무상교복 지원의 3대 무상복지 사업을 추진한다. 

2016년 113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성남시에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세의 청년 약 11,300여 명에게 분기별로 50만 원씩을 지급했다. 그 밖에 중학교 신입생 약 8,900명에게 교복비를 지급하였으며, 성남시 신생아 약 9천여 명을 대상으로 무상 산후조리 지원사업을 시행했다. 

능력 있는 정치인으로 성남을 넘어 전국에 이름을 알린 이 의원은 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부상하자 규탄 관련 집회에서 연설하며 대통령의 퇴진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권력 행사는 잔인하게 해야 한다. 죽도록 싸워서 깨부셔야 한다"고 강경하게 발언하며 정치에 답답함을 느낀 대중에게 큰 희열을 선사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안희정에 밀린 3위를 기록하며 고배를 마신다.

20대 대선 승복을 선언하는 모습(사진=이재명 의원실)
20대 대선 승복을 선언하는 모습(사진=이재명 의원실)

경기도지사에서 ‘대통령 직전’까지

이 의원은 차기 대권 주자로서 다음 행보에 많은 시선이 모였는데, 성남시장에서 체급을 올려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택했다. 일각에서는 서울시장 출마도 점쳤지만, 박원순 당시 시장이 자리를 차지했던 터라 경기도로 눈길을 돌렸다. 성남을 중심으로 경기도에서 그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했기에 무난히 당선됐다.

그는 경기도지사 취임 후 경기도 기본소득과 민간어린이집 회계관리시스템, 공공산후조리원, 표준시장단가 제도개선안 등 자신만의 확고한 정책을 실현하며 ‘역시 이재명’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다음 목적지는 자연스레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대통령 직전’까지 다다른 그는 간발의 차이로 낙선했다. 대장동 비리 혐의와 온갖 의혹이 판치는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되기란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는 법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대선에서 패배하자 칩거하며 스스로를 복기했다.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선이 아니더라도 선거에서 패배 후 상황을 되돌아봤다.

하지만 이 의원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선이 치러진 지 3개월 만에 지방선거가 열리며, 그는 더불어민주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대선에 함께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하고, 이 의원이 송 전 대표의 지역구인 계양 을에 출마했다. 각계각층에서 “그 누구도 패배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에 따른 결과는 ‘참패’였다. 민주당 자체 평가에 의하면 이낙연 전 대표는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를 지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방선거를 치르다 또 패배했다. 책임자가 책임지지 않고 남 탓으로 돌리는 그 짓을 민주당이 계속했다”고 말했고, 홍영표 전 원내대표도 “사욕과 선동으로 당을 사당화시킨 정치의 참담한 패배”라고 한탄했다. 

김종민 의원은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 이재명, 송영길 두 분이 한 달 만에 출마한 게 결정적”이라고 직언을 날릴 정도였다.

이재명 의원이 당대표 선거에 나서며 제주 합동연설회 중이다(사진=이재명 의원실)
이재명 의원이 당대표 선거에 나서며 제주 합동연설회 중이다(사진=이재명 의원실)

그런 이 의원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 대표 선거에 나섰다. 그가 아니면 내홍에 휩싸인 더불어민주당을 일으킬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의 발언이 얼마나 진실한지, 맞는 말인지는 결과를 까봐야 알 것이다. 그가 이끄는 민주당은 어디로 흐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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