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최재혁 기자] 아픔은 인간을 더욱 성장시킨다. '노 페인 노 게인(no pain no gain)'이라는 말처럼 뭔가를 얻으려면 고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원하는 걸 쉽게 얻지 않았다. 4·19 김주열의 아픔, 5·18 광주의 눈물, 6월 항쟁의 박종철과 이한열의 고통을 통해 민주화를 얻었다. 이와 함께 드러나지 않은 이들의 고통과 아픔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연극 '타자기 치는 남자' 공연장(사진=최재혁 기자)
연극 '타자기 치는 남자' 공연장(사진=최재혁 기자)

'배움'의 정도도, 늦음도 없다

​작문학원을 운영하는 '문식'은 깊은 달빛을 안주 삼아 술을 한 잔 하려는데, 눈앞에 웬 사람이 있어 깜짝놀라 주저앉는다. 그 사람은 바로 '경구'로, 3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맞춤법을 잘 몰라 찾아온 것이다. 다소 당황스러운 문식은 "얼마든지 드리겠다"는 경구의 말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가입서를 작성하는 도중 직업란에 '공무원'을 발견한 문식이 되묻자, 경구는 자신이 종로경찰서 반공팀에 속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던 문식은 금세 쫙 찢어진 눈초리로 경구를 노려보며 대뜸 '숙제'를 주겠다고 한다. 선생님의 말이면 덥썩 복종하는 경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등 고전문학 5권을 받게 된다. "2주 안에 다 읽고 독후감도 써오세요"라는 문식의 말에 겁 먹는 경구는 "...넵!"이라며 억지로 웃어본다. 아무래도 문식은 경구를 떨쳐내기로 한 것 같다.

​어느 늦은 밤 깊은 잠에 빠진 문식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혹시 모를 치한인가 싶어 야구방망이를 들고 문을 여는데 "선생님, 숙제 다했어요!"라며 활짝 웃는 경구의 얼굴을 보고 벙 찐다. 2주 동안 단 한 시간도 못 잤다는 경구는 "선생님이 주신 책이 모두 제 생각과 일치하더라고요?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님과 셰익스피어 선생님도 좌빨용공분자를 정말 싫어하셨나봐요"라며 자신만의 특이한 해석을 전한다.

​경구의 노력에 반할만도 하지만, 종로경찰서 소속에 반공팀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하게 느껴진다.  이에 다시 숙제를 내주는데 무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철학의 대표를 소개했다. 경구는 "저번보다 책은 줄었지만, 내용을 보니 마음은 더 무거워졌네요"라며 부담감을 드러낸다. 문식은 그가 제발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경구는 엄청난 노력파다. 그 어려운 책을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읽어내며, 이번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찾는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똑똑해지고 지혜를 얻을 줄 알았더니, 기존에 알던 것들이 의심이 되고 자꾸만 세상이 어지럽게 느껴지네요"라며 난색을 표한다. 이에 문식은 "어느 경찰이 순수이성비판을 읽기라도 했겠어요"라며 그를 위로한다.

연극 '타자기 치는 남자' 커튼콜에서 배우들이 인사하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연극 '타자기 치는 남자' 커튼콜에서 배우들이 인사하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나한테 왜 그랬어요?" 작은 돌맹이가 부른 '파멸'

​매일 술에 빠져사는 문식은 뭔지 모를 죄책감에 빠져 산다. 글을 쓰다가도 이내 접고 자꾸만 술에 취하기만 한다. 이때 한 손님이 찾아온다. 얼굴 한쪽에 짙은 화상 자국이 있고, 한 쪽 다리를 저는 바로 '형원'이다. 

​형원은 극의 배경인 1980년대 존재했던 '삼청교육대'에서 갖은 고문과 폭행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던 그는, 누군가의 모함으로 교육대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사람 취급은커녕 동물만도 못하게 살았다. 그 때문에 애국가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고,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이 파멸적인 분노만 소유했다. 단지 그를 모함한 사람에게 복수하려고만 할뿐이다.

​그를 모함한 사람은 바로 문식이다. 문식은 작문학원을 차리기 전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문제아' 한 명만 적어 내라는 '윗선'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형원'을 적어냈다. 적을 때만 해도 고작 '정신교육' 몇 시간 받고 풀려날 줄 알았기에 부담없이 적었지만, 그가 삼청교육대로 간 소식을 듣자 죄책감에 교직을 내려놨다.

​형원에게는 문제아를 적어내라는 윗선의 지시보다, 자신의 이름을 적은 문식에게 복수의 칼을 갈았다. 학창시절 돈이 없어 도시락 몇 번 훔쳐먹은 게 다인 그와 달리, 반에는 주변 친구를 괴롭히고 돈을 뜯는 못된 친구가 있었다. 형원과 그 친구는 돈이 없고 많음이라는 차이가 있었고, 문식도 이미 가진 게 없고 어려운 삶을 사는 형원을 적는 게 마음 편했을 것이다.

​문식을 죽이는 게 가장 쉬운 복수라고 여긴 형원은 자신의 깊은 숙원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문식의 시골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부터 노부모까지 손대기 시작한다. "제발 부모님만은 건드리지 말고, 너를 이렇게 만든 나한테만 분노를 풀어"라고 문식이 말하자, 형원은 그를 의자에 묶어 식칼로 위협한다.

​칼날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들어오려 하자 문식은 질끔 눈을 감지만, 이내 비명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보니 형원이 자신의 손목을 그으며 "내가 죽어가는 걸 똑똑히 지켜보세요. 진짜 지옥이 뭔지 천천히 느껴보라고요"라며 손목을 재차 긋는다. 이때 경구가 등장한다.

​다행히 형원의 손목은 되살아났고, 문식도 퇴원해 정상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문식을 찾아온 경구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는데, 대뜸 신제품이나 다름없는 타자기를 선물하며 보고서를 하나 제출한다. 거기에는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어긴 내용이 적혀, 경구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를 강하게 만류하는 문식에게 경구는 "선생님이 주신 책을 읽으며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배운 대로 진실에 다가가며 할 말은 하고 살려고요"라며 꾸벅 인사를 한 채 자리를 떠난다.

​연극 '타자기 치는 남자'는 세 남자의 고통 속에서 피어난 성장 이야기다. 경구는 배움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사실에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문식은 경구와 형원을 통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형원은 파멸적인 복수를 택한 게 아닌, 자신의 손목을 그으며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고 문식을 용서할 수 있게 됐다.

​성장은 고통을 양분으로 피어난다. 세 남자는 고통 속에서 살았고, 앞으로도 많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잣대로 세상을 보다 포근하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면 됐다.

연극 '타자기 치는 남자' 커튼콜에서 배우들이 인사하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연극 '타자기 치는 남자' 커튼콜에서 배우들이 인사하고 있다(사진=최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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