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환 전 산림청장(사진=산림청)
조연환 전 산림청장(사진=산림청)

[글=권선복 행복에너지 대표이사]

50년 전, 인현동 골목길에 열 평짜리 월셋집에서 고물 수동 인쇄기 한 대로 시작했다. 그것도 그를 잘 아는 고향 친구가 “이 집을 저당 잡아 뭐든 해 보라”고 집문서를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친구 집을 저당 잡은 돈으로 창업을 한 것이다. 50년 전의 일이다.

일거리가 없었고 어쩌다 일을 하면 6개월짜리 종이어음으로 받았다. 그걸 할인해서 공장을 꾸려 나갔다. 그는 세 아들의 아버지이자 9남매 생계를 책임진 장남이었다.
세 아들이 한창 자라는 시기에 쌍둥이 두 남동생을 데려다 좁은 집에서 함께 지내며 인쇄 일을 가르쳤다. 그렇게 3형제가 공장을 꾸려 나갔다. 은행 문턱은 밟아 볼 수도 없었고 고리 사채를 빌려 공장을 돌렸다. 기껏 몇 푼 벌어야 고리의 이자를 주고 어음을 할인하면 늘 빈손이었다.

그마저 부도도 참 많이 맞았다. 800만 원을 주고 아파트를 사 입주하던 해 2,700만 원 부도를 당했다. 죽음도 몇 번 생각했었다. 광진교까지 가서 투신하려고 하니 세 아들과 9남매는 어쩌나 싶어 뛰어 내리지도 못했단다. 그날 교회에서 그렇게 많이 울었단다.

월세를 내지 못하니 공장을 비워 달라고 주인이 통보하러 온 날, 시골에서 아버지가 공장에 오셨더란다. 사정을 모르는 아버지는 공장 구석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시는데, 이를 본 집주인이 저 분이 누구냐고 묻더란다.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올라 오셨다고 말하니 “나가지 말고 그냥 계속 있으라”고 하더란다.

공장이 조금씩 나아지자 아파트 두 채를 사서 두 동생을 먼저 입주시킨 다음 당신도 아파트로 입주했다. 

형은 두 동생을 자식처럼 길렀고, 두 동생은 형님을 아버지처럼 섬긴다. 

엊그제 창업50주년 감사예배를 드렸다. 9남매 가족과 종업원이 함께했다.

하나님께서는 어진 사업주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신다. 65세에 폐암수술을 받고 재발되어 70세까지나 사실까 했는데 83세인 오늘까지 건강하시다.

넓은 자기 땅에 자기 공장을 짓고 7색과 4색 자동 인쇄기도 도입했다. 작은 인쇄소에 불과하지만 종업원을 가족처럼 돌본다.

지금은 회장으로 물러나고 가평에서 텃밭을 가꾸신다, 두 동생이 사장과 전무를 맡고 있다. 업계에서 소문난 의좋은 형제다.

동생 뒷바라지에 당신은 공부하지 못했는데, 아들 3형제는 명문대학을 나왔고, 손자 손녀는 옥스퍼드대학을 비롯한 세계 유수대학을 졸업했다.

4형제 모두 교회장로이고 세 딸은 권사이며 막내딸은 목사 아내다. 막내아들은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의 장로로 대를 이어 교회를 섬기고 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는 잠언의 말씀을 가훈으로 지켜온 당신은, 오늘도 ‘마른 떡 한 조각’이 되어 자식과 동생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 마른 떡 한 조각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9남매 가정은 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

73년간 곁에서 지켜본 나의 형님 향산 조창환 장로 이야기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신 나의 형님.

“형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이 글은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수기(手記)다. 가난 속에서도 자신을 희생하여 집안을 이끌어간 큰형에 대한 감사함과 깊은 존경심이 담겨 있다.

큰형이 가장(家長) 노릇을 하기 위해 학교 공부를 그만두던 무렵, 그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 연약했던 아이, 6·25 전쟁 중 피난 준비를 하는 그의 부모에게 친척들은 “줄줄이 어떻게 다 데리고 가려고 그래. 쟤는 사람구실 하기 틀렸어. 그냥 버리고 가”라며 혀를 찼다. 

태생적으로 약골이었던 이 아이가 50년 후 산림청장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4남 5녀 중 다섯째였던 이 아이가 바로 조연환 전 산림청장이다.

역경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이 목표로 한 것을 이룬 후, 사심 없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은퇴하여, 초록빛 나무가 우거진 자연을 벗 삼아 평온한 노년을 보내는 삶! 아마도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일 것이다. 

최말단 9급 공무원으로부터 출발하여 2004년 제25대 산림청장에 오른 후, 38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충청남도 금산으로 귀농하여 15년째 살고 있는 조연환 전 산림청장이 바로 그렇다. 

그의 집에는 추사 김정희 서체로 ‘죽로지실(竹爐之室)’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죽로지실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차를 끓이는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추울 때 한기를 가시기 위하여 방 한가운데 화로를 놓았다. 방 한가운데 화로를 놓다보니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데이거나 다치지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화로 주변에 대나무 발을 둥그렇게 쳐놓았고, 그러한 화로가 있는 방을 죽로지실(竹爐之室)이라 불렀다고 한다. 즉 “나의 편안함과 이로움을 위해 남을 다치게 하거나 손해를 보지 말도록 하라”는 경구인 셈인데,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삶의 철학이 담긴 글이기도 하다. 

“형제위수족(兄弟爲手足)”. 명심보감 안의편(安義篇)에 나오는 말이다. 형제 사이는 손발과 같아서 한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형제끼리 우애 있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점점 가족 간의 사랑도 희미해지고 인면수심 범죄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있는 이때, 기꺼이 마른 떡 한 조각이 된 큰형과 그런 큰형을 부모처럼 섬긴 동생들의 우애에 새삼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시절의 사무쳤던 가난을 형제의 끈끈한 우애로 이겨낼 수 있었고, 이 우애야말로 그가 9급 말단직부터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산림청장에 이를 수 있는 단단한 디딤돌이 되어준 것이라고 믿는다.

권선복 행복에너지 대표이사
권선복 행복에너지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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