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경제안보 시대 적임자“
‘행정의 달인’ 불릴 정도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사진=대통령인수위원회)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사진=대통령인수위원회)

[CEONEWS=최재혁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4월 3일 새 정부의 국무총리로 한덕수 전 총리를 지명했다. 윤 당선인이 청와대 권력을 기존보다 많이 낮춘다고 공약했으니, 총리 인선에 더욱 집중됐던 터다. 게다가 얼마 차이 나지 않은 득표율로 당선된데다가, 여소야대 상황에서 ‘협치’는 불가피했다. 윤 당선인은 ‘한덕수 국무총리’를 통해 어지러운 국면을 헤쳐나가고자 한다.

총리 인선 발표하는 윤석열 당선인(사진=윤석열 유튜브)
총리 인선 발표하는 윤석열 당선인(사진=윤석열 유튜브)

尹 "경제안보 시대 적임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3일 새 정부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한덕수 전 총리를 지명했다. 윤 당선인은 이날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새 정부 첫 인선안을 발표했다.

윤 당선인은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한 후보자는 정파와 무관하게 오로지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국정 핵심 보직을 두루 역임하신 분"이라며 총리 인선을 발표했다.

이는 윤 당선인이 당선인 신분으로써 이루어진 첫 내각의 인선 발표로, 민주당 정권에서 총리를 지냈던 ‘한덕수’의 발탁에는 대통합 차원의 협치를 노린 것으로 파악된다. 우선 민주당 총리였지만, 여소야대 상황에서 청문회를 무사히 헤쳐나가는 것이 관건으로 될 것이다.

윤 당선인은 지명 배경에 대해서도 "민관을 아우르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각을 총괄하고 조정하면서 국정과제를 수행해나갈 적임자"라고 말했다.

이어 "국민의 뜻을 잘 받들어 일 잘하는 정부로 민생과 외교·안보를 빈틈없이 챙기겠다”라며 “한덕수 총리 후보자에 대한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 후보자는 전북 전주 출신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에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통상 분야의 엘리트 코스를 천천히 밟아나갔다.

이에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이라는 능력을 인정받으며 국민의 정부에서는 순서대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대통령 경제수석을 지냈고, 참여정부에서는 국무조정실장,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정권이 바뀐 이명박 정부에서는 주미대사로 활동했다.

그의 활약 중 하나는 국무총리 재임 당시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의 기반을 조성한 결과가 지금까지 평가되고 있다.

한 후보자는 외교 안보와 경제를 하나로 합쳐 대응하는 '경제안보론'에 집중하며 윤석열 정부의 핵심 가치인 '통합'에 모두 통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또 김대중·노무현의 의지를 계승하는 민주당으로서 청문회에서 크게 반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최종 총리 후보로 낙점된 것으로 분석된다.

윤 당선인의 총리 지명 발표 직후 한 후보자는 "경제와 지정학적 여건이 매우 엄중한 가운데 국무총리 지명이라는 아주 큰 짐을 지게 돼 영광스러우면서도 매우 무겁고 큰 책임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와 함께 강한 국가를 위한 자강 노력과 국익 중심 외교, 재정 건전성 확보를 중요한 국정과제로 선택하며, ▲국익 외교 ▲재정 건전성 ▲국제수지 흑자 기조 유지 ▲생산성 향상 등도 함께 제시했다.

또 한 후보자는 중요 의제로 떠오른 책임총리제에 대해서도 "청와대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좀 더 내각과 장관 쪽으로 옮겨서 추진 과제에 대해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권한을 갖고 추진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라며 "이것이 행정부 전체 운용에 훨씬 더 효율적이겠다는 것이 당선인의 말씀이고 저도 당연히 동의한다"고 뜻을 밝혔다.

한편, 민주당은 "국정운영 철학과 능력, 자질을 국민 눈높이에서 철저히 검증하겠다"며 송곳 검증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은 "청문회로 새 정부 출범을 발목 잡아서는 안 될 것"이라며 쉽사리 허가해주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한덕수 경제부총리와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5단체는 경제현안 논의를 위해 간담회를 열고 포즈를 취하고있다. 오른쪽부터 이수영 경총 회장, 강신호 전경련 회장, 한덕수 경제부총리, 김재철 무협 회장, 김용구 중기협 회장,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사진=전국경제인연합회)
한덕수 경제부총리와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5단체는 경제현안 논의를 위해 간담회를 열고 포즈를 취하고있다. 오른쪽부터 이수영 경총 회장, 강신호 전경련 회장, 한덕수 경제부총리, 김재철 무협 회장, 김용구 중기협 회장,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사진=전국경제인연합회)

뛰어난 머리·다양한 경험·경력 지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1년 전인 1949년 6월 전주에서 태어난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는 6남 3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1967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동기로는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이 있다. 무사히 학교를 마친 뒤 뛰어난 두뇌를 지렛대 삼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공직 입문 이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MA)와 동 대학원 경제학 박사(Ph. D) 과정을 졸업하며 경제 엘리트에 다가섰다.

뛰어난 두뇌를 소지한 한 후보자답게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수석으로, 서울대학교 졸업생 중 3등으로 졸업하며 ‘대법원장 상’까지 수상했다. 이후 입대하며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는데, 현역병 출신 총리는 역대 4명뿐이라, 그의 모습이 더욱 빛나 보인다.

경제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0년에는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경제공무원으로 일찍 근무를 시작한다. 관세청이 첫 발령지였는데, 1976년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비서관 자격으로 구미사절로도 파견됐다.

이후 1977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앞서 나왔다시피 하버드대학교에서 1979년까지 공부에 매진한다. 이내 귀국하며 서기관으로 승진하는데, 상공부로 자리를 옮겨 미주통상과장을 맡으며 1982년에 또다시 미국길을 떠난다. 

부족한 공부가 있다고 느꼈는지 하버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곧장 귀국길에 오른다. 재차 상공부 과장으로 근무하다, 1989년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며 상공부 중소기업국 국장을 맡는다. 상공부 중소기업국은 현재 중소벤처기업부의 전신이다.

뛰어난 머리와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밑바탕 삼아 1990년 산업정책국장을 맡으며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중 산업 관련 실무를 맡게 된다. 1992년에는 이사관, 1993년에는 전자정보공업국장으로 위치를 바꾸며 점차 높이 솟았다.

한덕수 경제부총리와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5단체는 경제현안 논의를 위해 간담회를 개최하였다(사진=전국경제인연합회)
한덕수 경제부총리와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5단체는 경제현안 논의를 위해 간담회를 개최하였다(사진=전국경제인연합회)

본격적인 ‘정치 인생’ 시작 

노태우 정부에서 잠시 일했던 게 ‘터닝 포인트’였을까?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 대통령 비서실로 파견돼 경제수석 밑의 산업담당비서관을 맡게 된다. 취임 2년 차인 1994년에는 잠시 청와대를 벗어나 상공부로 복귀하지만, 이내 관리관으로 승진하며 기획관리실장과 통상무역실장을 역임했다. 한 후보자가 통상무역실장을 지내는 동안 OECD 가입 추진과 일본 무역 규제 해제 등 굵직한 실무를 직접 담당했다.

1996년에는 48세의 나이로 차관으로 승진하며, 이듬해에는 특허청장으로 올랐다. 그러나 곧 IMF가 터지며 하필 통상산업부 차관 재임 중에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어 수습하며 대부분을 지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자 1998년 3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역임했다. 한 후보자는 역임 기간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최초로 추진했으며, 칠레와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며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또 APEC 정상회의 업무를 수행하며 산업자원부장관까지 거론됐으나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2001년 3월 통상교섭본부장을 그만두고 나서 같은 해 12월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를 지내며 장관급 특명전권대사를 지냈다. 또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과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되며 살아있는 권력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한-중 마늘 협상 파문으로 인해 경질됐다.

한덕수 후보자와 노무현 전 대통령(사진=노무현재단)
한덕수 후보자와 노무현 전 대통령(사진=노무현재단)

‘행정의 달인’ 한덕수

경질 이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던 한 후보자는 2003년 산업연구원 원장과 2004년 대통령 옆에서 국무조정실장을 지낸다. 하필이면 실장 재임 기간에 탄핵 사태가 벌어지며 어려움을 겪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지내며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2005년 3월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에 앉으며,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금융-산업자본 분리 관련 정책을 직접 좌지우지했다. 이듬해에는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삼일절 골프 사건’으로 사퇴하게 되자,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겸임하며 총리의 ‘맛’을 봤다.

드디어 한 후보자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을 담당할 제38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패착으로 인해 인사청문회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상과 달리 무난히 통과해 인준에 성공했다.

재임 기간에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며 북한의 내각 총리였던 김영일과 ‘총리 회담’을 펼치기도 했다. 한 후보자는 총리 재직 당시 세간에서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까지 붙일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정권이 바뀌자 이명박 정부의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며 진보와 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고 실무형 인사로 중용됐다. 대사직 퇴임 후에는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선임되는 등 활동이 끊이지 않으며 다양한 사회 기관에서 활동했다.

한덕수 후보자가 총리 인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사진=윤석열 유튜브)
한덕수 후보자가 총리 인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사진=윤석열 유튜브)

인간 ‘한덕수’를 살펴보면 왠지 모르게 여말선초의 재상 ‘황희’가 떠오른다. 고려 때부터 관직에 오른 황희는 능력의 필요성을 조선에서도 인정받아 ‘재상’이라는 자리까지 오른다. 그는 강직하고 보수적인 편으로, 시대를 뛰어넘던 세종의 제동장치 역할을 해냈다. 또 대국을 보는 시각이 뛰어났고 당대에 알아주는 군자로 범죄 사건에도 너그러움을 위주로 처리했다. 정치 경력이 1년도 안 되는 윤 당선인에게 한 후보자는 제동장치임과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뛰어나다. 다가올 ‘한덕수 국무총리’는 황희 못지않은 최고의 재상으로 불리길 바란다.

CEONEWS는 국제 의료 NGO ‘한국머시쉽‘의 활동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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