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장수 이성계...대쪽 검사 윤석열
모든 싸움 이겨...살아있는 권력까지 수사
신진사대부가 추진한 왕, 국민이 만든 대통령

이성계 어진(사진=전주역사박물관)

[CEONEWS=최재혁 기자] 대선이 끝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흥분이 가시질 않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은 패배한 이재명 후보의 진정어린 사과를 바탕으로 당 내부를 수습하는 중이고, 승리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인수위를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남은 5년을 잘 보내도록 준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윤석열’이라는 사람의 인생에 많은 관심이 가는데, CEONEWS에서는 이를 역사 속 리더와 비교해보며 앞날을 예견해보고자 한다.

변방 장수 중앙으로...대쪽 수사로 얼굴 알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의 세력 중에 하나였다. 이성계의 가문은 고려의 중앙과 너무나 먼 거리였고, 관리도 아니었지만 공민왕의 ‘반원(反元)정책’덕에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고려 조정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들이민 뒤,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361년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같은 해 겨울 10만 홍건적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자 이성계는 2,000명의 병사로 홍건적의 두목을 모두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운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장수의 침입을 물리치고, 1364년 덕흥군의 1만 군대를 최영과 함께 무찌르며 대단한 공을 세운다.

또 자신의 이종사촌인 여진족 ‘삼선ㆍ삼개의 난’을 평정하며 자신의 근거지인 동북면의 안정을 되찾는다. 그는 이로써 고려 중앙 조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중요 벼슬을 거치게 된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방영한 위화도 회군 설명 모습(사진=MBC)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방영한 위화도 회군 설명 모습(사진=MBC)

위화도 회군·쿠데타...조국 대전

북쪽이 정리되자 남쪽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당시 힘을 키우던 왜구의 침입은 망해가던 고려를 크게 흔들었다. 왜구는 해안가뿐만 아니라 내륙 깊은 곳까지 침입하며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성계가 극악한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 전투는 규모와 성과를 따져 ‘황산대첩’이라고 부른다.

20여 년간 고려 조정을 위해 북쪽과 남쪽을 모두 어우른 이성계는 모든 전투에서 이기며 ‘불패의 사나이’, ‘난세를 구할 영웅’으로 명성을 쌓았다. 거듭되는 승전으로 벼슬이 승승장구하며, 그의 인기와 명성을 좇아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신진사대부’가 찾아왔다.

이즈음 중국 정세는 쇠퇴하는 원과 떠오르는 명의 다툼이 치열했다. 이에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 초기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 정벌을 요구했다. 이성계는 여름철 농번기 시기의 전투는 부적절한 점이 많고, 왜구가 토벌되지 않음을 따지며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갑이 아니라 을이었다.

결국 본인이 원치 않은 요동 정벌을 나선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 큰 비를 만났다.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죽더라도 싸울 것인가’, ‘죽는 것보다 일단 사는 게 맞다’고 갈등하던 중 결국 선택을 내렸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이미 왕명을 거역한 반역자였고, 대군을 이용해 우왕을 내쫓고 최영을 귀향보냈다. 이성계의 옆에는 그를 지지하는 백성들과 집에 돌아가고픈 군사들, 국정의 신진세력인 신진사대부가 따랐다. 공양왕을 새롭게 왕위에 앉히며 이성계는 고려의 일인자 같은 이인자로 남았다.

백성이 이끈 왕...국민이 만든 대통령

허울뿐인 왕과 고려의 사실상 일인자의 동거는 모두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신진사대부 중 고려를 지키자는 온건파인 ‘정몽주’는 허울뿐인 왕을 잘 모셔 고려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정도전을 비롯한 급진파는 다시 수리해 쓸 바에는 부수고 새로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성계는 철저한 군인이었다. 변방의 장수로 시작해서 군사를 타이르고, 병법을 공부하며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밖에 체득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왕’이 되라고 권유한 것은 누구도 아닌 신진사대부였다.

신진사대부에게는 정치의 ‘때’가 묻지 않은 이성계가 매우 바람직했다. 오직 전장에서 살았고, 정직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구사하는 이성계는 평생 공부만 해온 사대부들이 다루기 너무 쉬웠다. 

열심히 싸우기만 했던 이성계는 가만히 앉아서 왕이 됐다. 그의 아들 이방원은 온건파의 수장 정몽주를 직접 제거하고, 신진사대부는 공양왕이 왕위를 선위하도록 강하게 압박했다. 그야말로 어부지리에 가깝다.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사진=문화재청)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사진=문화재청)

왕자의 난...윤석열 정부는?

고려의 변방 장수에서 500년 기틀을 세운 조선의 왕이 된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겨우 6년밖에 되지 않는다. 일평생 영웅으로 대접받고,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까지 이뤄낸 그였다. 하지만 함께 건국을 이뤄낸 신진사대부와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들의 난이 벌어지며 말년에 피눈물을 흘렸다.

비극의 시작은 세자 책봉이었다. 조선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 자리에 앉혔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고려 말의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 때 묻지 않았기에 올바른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다른 아들 중에서도 개국공신으로 손꼽힌다. 조선 개국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직접 처리함과 함께, 피곤하고 귀찮은 일과 더불어 중대사를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도왔다. 그런 그에게 막내의 세자 책봉은 큰 배신감을 안겼다.

게다가 정도전은 개국 이후 강력해진 왕자들과 귀족의 무력을 거두기 위해서 ‘사병 폐지’를 시행하고자 했다. 요동 정벌을 이유로 들며 군세를 모았지만, 사실상 방석의 무난한 왕위 등극이 이유였다.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이방원이 아니었다. 즉시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과 개국공신들을 급습해 죽이고, 세자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했다. 아버지 이성계가 엄연히 살아있는 와중에 두 아들과 사위를 잃었기에, 인생무상을 느끼며 1398년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정종의 즉위 이후 난을 일으킬 경우에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보일까 우려한 이방원은 잠시 숨을 돌리며 기회를 엿봤다. 이후 2년 뒤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넷째 형 방간을 물리치며 조선의 세 번째 왕으로 등극한다.

모든 것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모셔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는 모조리 죽여 돌려보내지 않으며 ‘함흥차사’란 말이 태어난 배경을 만들었다.

이처럼 영웅으로 살았고, 때 묻지 않은 이성계였기에 왕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지(無知)는 왕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을 정도로 이용당하기 마련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유사한 삶을 살았지만, 아직 말년까지 이르진 않았다. 부디 주변인의 말을 가려서 듣고, 올바른 판단으로 국정 운영 방향을 설정하며 ‘왕자의 난’을 겪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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