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과 스펙에 젊음을 갖다 바치는 안타까운 청년의 이야기

영화 혜옥이 포스터(사진=영화 혜옥이)
영화 혜옥이 포스터(사진=영화 혜옥이)

[CEONEWS=최재혁 기자] '인사혁신처 사이버국가고시센터'에 따르면 작년 5·7·9급 공채 응시자 수는 약 16만 명에 달한다. 이는 2020년 수능시험 응시자 수 548,734명의 약 1/3에 달하고, 고3 수험생 394,024명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다. 게다가 16만 명이라는 숫자가 경찰·소방 공무원 등 각종 공무원 응시생을 뺀 인원이라는 걸 생각하면, 수능 응시자만큼 많은 청년이 공무원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토록 많은 청년이 공무원에 도전하는 이유는 ▲ 잘릴 이유 없는 안정적인 직장에 노후 걱정 없는 연금 등 혜택 ▲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마땅한 취업 자리가 없을 때 ▲ 학교에서 배운 거라곤 하루에 10시간 넘게 공부하는 것뿐이라서 ▲ 공무원은 사회적으로 우호적인 직업이라서 등이 있다. 살펴보면 공무원이 안정적이고 나쁘지 않아서 하려는 것뿐, 진정 좋아서 지원하는 이유는 드물다는 것이다. 영화 '혜옥이(감독 박정환)'는 이처럼 안타까운 실정을 꼬집었다.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서 답변하고 있는 혜옥이의 박정환 감독(사진=서울독립영화제)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서 답변하고 있는 혜옥이의 박정환 감독(사진=서울독립영화제)

돼지우리에 갇혀 책만 바라보는 청년들

혜옥의 오프닝 장면은 모두가 잠든 밤에 돼지우리 축사를 조명하는데, 유독 한 마리의 돼지가 숨을 "컹!"하며 강하게 내뱉는다. 관객은 단숨에 '이 돼지가 주인공을 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영화와 연관성을 찾기 시작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공무원 준비생(이하 공시생)'을 포함해 수능, 자격증 등 각종 취업과 스펙을 준비하는 성실한 대한민국 청년이 즐비하다. 이들은 독서실이나 카페를 찾아 몇 시간이고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며 숙인 고개는 올라올 줄을 모른다. 혹자는 이들을 보며 "누군가 강요한 일이 아니다. 본인들이 좋아서, 성공하고 싶어서 공부하는 데 왜 불만을 품냐"고 꼬집는다. 돼지에게도 우리 안의 자유가 있지만, 한정된 자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 돼지와 공시생의 공통점이다.

주인공 '라엘'은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다. 비록 한 번의 재수를 거쳐 명문대에 입학했지만, 별 탈 없이 졸업까지 끝마쳤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명문대를 나와도 마땅한 취업 자리가 없다. 남들처럼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다.

'5급 재경직'이라는 꽤 난이도 있는 시험에 도전한 라엘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야"라고 자신한다. 라엘의 어머니 또한 "너는 원하는 건 뭐든 이뤄냈으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필요한 건 엄마가 다 해줄 테니까 공부에만 집중해"라며 "사랑하는 우리 딸, 파이팅!"이라고 북돋아 준다. 라엘도 엄마의 호응에 맞장구치며 연신 파이팅을 외친다.

혜옥의 엄마가 집을 알아보고 있다(사진=영화 혜옥이)
혜옥의 엄마가 집을 알아보고 있다(사진=영화 혜옥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낙타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

첫 시험에서 1차 합격에 이른 라엘은 아쉽게 2차에서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갓 공부를 시작한 공시생이 1차 합격을 받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보통 5급 공채 합격에 걸리는 시간은 3~5년으로, 1차 합격까지 최소 2년의 세월이 걸린다.

그러나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던가? 라엘의 성적은 오르긴커녕 계속 하향되며 주변 장수 공시생들과 평준화를 이루기 시작한다. 공시생들 사이에서도 수재로 불리던 라엘은 이제 평균, 아니 불가능에 가까워지며 결국 7수까지 하게 된다.

이제는 진짜 불가능하다, 안 되겠다, 싶지만 주변에선 라엘을 압박한다. 가장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라엘의 어머니는 몸이 부서지라 일하고, 새벽 기도를 나가는 등 아주 헌신적이다. 또 "네 아빠처럼 정해진 직업 없이 떠돌다 객사하기 싫으면 꼭 시험에 붙어라"라고 압박한다. 하다못해 라엘이 시험에서 떨어지는 이유가 알고 보니 이름 때문이라며 "네 이름은 이제 혜옥이야. 용한 스님에게 점지받았어"라고 닦달한다. 

라엘, 아니 혜옥이는 학원 강사에게도 압박당한다. 매몰비용을 설명하며 혜옥에게 "여기서 가장 오래 공부한 네가 기회비용에 관해 설명해볼래"라고 묻지만,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듯 재채기가 터져 나오는 혜옥은 당장 학원을 뛰쳐나간다. 또 독서실에 찾아간 혜옥이 끊임없이 재채기하자 주변 공시생들이 "계속 재채기할 거면 집에서 공부하라"며 퇴실을 요구한다.

흔히들 압박과 응원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험한 말로 무거운 분위기를 잡고 진지한 말을 하면 압박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말로 "할 수 있다!"를 외치면 응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압박과 응원은 상대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혜옥에겐 엄마의 응원이 압박으로 다가왔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부를 포기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신의 몸을 파괴하면서까지 혜옥의 공부를 지원했다. 또 타인과의 비교와 "넌 무조건 할 수 있는 아이야"라는 말은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내가 될 때까지 못 벗어나는구나"라는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진상 손님에 대처하는 혜옥이(사진=영화 혜옥이)
진상 손님에 대처하는 혜옥이(사진=영화 혜옥이)

"나 이제 사람답게 살고 싶어"

결국 혜옥은 엄마 몰래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버는 게 처음이다 보니 어려운 일투성이다. 혜옥이 무한 리필 고깃집에서 서빙하는데 웬 손님이 "한돈이라는데 전혀 아닌 것 같다. (고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진짜 한돈을 가져와라"며 혜옥을 괴롭힌다. 무례한 손님에게 시달리는 혜옥은 사장에게 말했지만 "이런 작은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네가 무슨 고시 합격하겠냐"며 비아냥거린다.

혜옥은 돼지우리와 같던 고시 생활을 간신히 끝마쳤지만, 우리 밖의 세상은 돼지 혼자 살아가기엔 너무 버겁다. 가진 것 없이 공부만 해온 혜옥에게 사회는 너무나 차갑고 잔인하다. 

모든 삶은 비극이라고 하지만 혜옥의 삶은 너무나 안타깝다. 명문대를 졸업하며 큰 꿈을 키웠던 혜옥은, 본인도 모르게 고시 공부라는 지옥에 빠져 젊음을 바친다. 앞서 학원 강사가 설명한 매몰비용은 과도한 경쟁을 유발하는 우리 사회에서 희생당한 혜옥과 청년을 뜻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들 부럽지 않은 건실한 직장에 다니며 가족을 거뜬히 먹여 살릴 줄 알아야 한다. 위로는 어느새 늙은 부모를 공양해야 하고, 아래로는 토끼 같은 자식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지금도 청년들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스펙을 쌓고, 좋은 기업에 다니기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친다. 혜옥이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남겨진 무수한 혜옥이가 이젠 행복해질 때가 아닐까?

좌절하는 혜옥(사진=영화 혜옥이)
좌절하는 혜옥(사진=영화 혜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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