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가발공장 공순이들이 무너트린 유신정권

손진기(시사문화평론가, 드림공화국 대표)
손진기(시사문화평론가, 드림공화국 대표)

김경숙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어려워진 집안을 돌보기 위해 서울로 상경합니다.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떡 장사를 하면서 자녀를 키웁니다.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된 경숙이는 남동생만큼은 잘 키워 보겠다고 보따리 하나 들고 15살에 서울로 상경합니다.

3년 동안 시다(보조원)로 청량리 근처 공장에서 방황하다 당시 인기가 높았던 가발 수출 공장인 YH무역에 취직한 경숙이는 밤낮없이 일해야만 했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할 때면 졸다가 재봉틀에 손을 박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경숙이는 삶은 고단했지만 15,028원(당시 평균 월급 3만 원)의 월급을 받고 그나마 얼마간의 돈을 고향 집에 보낼 수 있어 힘든 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소위 ‘공순이’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사회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가사도우미는 ‘식순이’,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공순이’, 버스 안내양은 ‘차순이’로 낮춰 불렀습니다.

YH무역은 1965년에 자본금 100만 원에 종업원 10명으로 시작한 가발 수출 공장이었습니다. 대표는 장용호. 대표의 이름을 따서 YH무역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YH무역은 승승장구, 창업한 지 5년 만에 종업원 수가 3,000명으로 늘었고 정부로부터 산업 훈장도 받은 국내 최대의 가발 수출업체로 성장합니다.  

YH무역의 장 회장은 사업적 감각도 뛰어났지만, 창업 전까지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무역관이었습니다. 업무 중에 취득한 정보를 자신의 사업에 이용해서 개인의 이익을 취한 장용호. 왠지 업무에 취득한 토지 개발의 정보를 빼돌려 개인의 이익을 속여 뺏은 LH 투기 사건과 닮아 있는 듯합니다. 

또 막강한 인맥은 청와대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정보와 인맥,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당시 상상도 못 할 돈을 벌어들였던 겁니다. 가발 하나로 재계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YH무역. 가발을 수출해서 외화를 많이 벌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가발 수출해서 번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랐습니다. 장 회장은 미국에 호텔을 짓고, 백화점을 개점하고, 별장을 만들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월급은 밀렸는데, 3,000여 명의 직원들을 모두 나가라 했습니다. 여직공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생존권을 보장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라고 외쳐 보았지만,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당시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18~22세의 여성 노동자가 73만 명) 어떤 공장에서는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안 들어주니까 너무나도 억울한 마음을 안고 23세의 여공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녀의 왼팔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이들은 뭉치기 시작합니다. 농성을 벌이고 자기의 주장을 담은 이야기들을 노래로 개사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피땀 흘러왔는데 아~ 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친 눈에 빛이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그들이 불렀던 노래 가사입니다.

청와대에서 대책 회의 열립니다. 결론은 강경 진압! 이들을 용인해 주는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이유입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그럼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개선해준 선례는 있었나요? 

기숙사에 갇혀 있던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목욕탕에 가는 척하며 신민당사로 몰려갑니다. 신민당사로 진입에 성공한 이들이 무려 175명.

경찰들은 소위 101작전이라 명명된 연행 작전으로, 이들은 신민 당사에서 끌려 나옵니다. 머리끄덩이를 잡혀 나오고, 옷이 다 찢겨서 끌려 나오고, 젖가슴을 잡히고, 곤봉으로 머리가 깨어지고….

흰 장갑을 낀 사복들의 말, “이 쌍년들 일이나 열심히 하지.... 니들이 뭘 안다고 농성이야….” 그 광경이 너무도 비참하여 경찰이 경찰을 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다음은 후에 한 전경의 고백입니다. “사복들처럼 과격하진 않아도 저희 전경 기동대원들도 머리채를 잡거나, 젖가슴을 부여잡거나 하였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의 시위는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았고, 안전을 많이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대학생들의 시위과정에서 다치거나 하면 국민에게 파급을 줄 수 있다고 하여 위에서도 특별히 안전을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YH의 농성 같은 경우는 닥치는 대로 진압을 해도 좋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렇게 하여도 국민에게는 파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이 대목은 도저히 참아 지지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하층 계급의 실태입니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 내 나라가 맞습니까?

그들의 지키려는 신민당원들과 대변인, 국회의원들은 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구타당했습니다.

바로 그때 바닥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농성 중이던 직공 한 명이 떨어졌습니다. 경숙이였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한 후였습니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유신정권과 정면 대결을 선언합니다. 기자회견을 통해, “나는 박정희 씨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한다. 암흑적인 살인 정치를 감행한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당시로써는 매우 센 발언의 기자회견. 감히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박정희 씨라고 불렀다?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국회에서는 공화당을 중심으로 김영삼 의원 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동의안이 일사천리로 국회를 통과 합니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

열흘 뒤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는 YH 사태의 진상규명, 유신철폐, 독재 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소요사태가 일어납니다. 소요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마산으로까지 번집니다. 부마항쟁의 시작입니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고교생, 샐러리맨, 노동자, 식당 종업원, 아줌마들까지 시위에 합세합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됩니다. 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현장에 내려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박정히 대통령에게 이것은 민란이라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고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나는 그런 짓 안 한다. 나는 발포 명령 내가 직접 한다.” 부산 마산 사람들을 쏴 죽이라는 겁니다. 옆자리에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한술 더 떠서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100만~200만 명쯤 죽인다고 뭐 까닥 있겠습니까?” 

이 대화가 사실이라는 점이 내 마음을 심하게 서글프게 합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일국의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나눈 대화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이에 격분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이 버러지 같은 놈”하며 총격을 가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김재규의 방아쇠는 당겨졌습니다. 이 사건이 10, 26 대통령 시해 사건이다.

 YH무역의 경숙이의 죽음이 부산 마산 항쟁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마무리 큰 사건도 시작은 작은 실수와 간과에서 비롯됩니다. YH무역의 잘못된 경영과 여직공들을 무시하고, 노동력을 착취한 잘못된 사주의 사고방식이, 멸시받고 피눈물 나게 일했던 여공들의 절규가, 보이지도 않았던 공순이들의 힘이 유신정권을 무너트린 단초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공익을 위한 것이지만 소수의 아픔을 헤아릴 줄 하는 아량이 민주주의를 행하는 나라 리더의 덕목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공익을 앞세운 것이 정권의 연장을 위한 독재의 천체주의가 아닌지 정권을 잡은 위정자들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작은 것이 큰 물결 되어 정권 잡은 자의 목을 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지나 않았는지...

임기가 끝나면 감옥을 거처야 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숙명적 과제처럼 남아 있은 고리를 끊어내야 성숙한 민주주의 실현이 아닐까? 임기가 끝나고도 국민에게 존경받는 대통령을 내 생전에 볼 수 있기를...

그 후 고 김경숙의 사인은 과거사 진상 규명위원회에서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경숙이 휴가를 얻어 잠시 고향을 찾았을 때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며, 고 김경숙의 가족들은 오늘을 살아 내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주장하다 쓰러져간 민주주의 호국 열사들의 명복을 빕니다.

CEONEWS는 국제 의료 NGO ‘한국머시쉽‘의 활동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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