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삶은 내 선택의 총합, 기부도 그 연장”
- “과학 발전이 곧 국가의 발전”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남들은 돈을 모으고 재산을 불리면 그것도 거둔 삶이 아니냐고 묻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돈 모으고 재산 불리는게 삶의 목표라면 또 모르겠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비로소 수확하는 거다. 그전까지는 무엇을 하든 씨앗을 뿌리는 것에 불과하다.”

- 이수영 자서전 -

 

[CEONEWS=이재훈 기자] 성공한 인생이라는 기준을 의 보유 정도와 상관 짓는 이들도 많지만, 보유한 돈을 어떻게 가치있게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 국내외 기업인들이 공익적 기부에 앞 다퉈 나서는 요즘 기부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들이 진화하고 있다. ‘KAIST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신념으로 KAIST 개교 이래 최고액을 기부해 화제를 낳았던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기부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것은 나의 한평생 삶이 축약된 결정이라 말한다. 평생 모은 재산을 KAIST에 기부한 일에 후회는 없다고 말하는 이 회장은 이것이 바로 성공한 삶이라 여기고 있다.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현재를 넘어 다음세대의 미래를 열어주고 있는 이 회장의 행보는 기부인생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되짚어 보게 한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20 아시아 올해의 자선활동 영웅 15인'(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20 아시아 올해의 자선활동 영웅 15인'(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기부’, 축복과 은혜로 채워지는 삶

지난 2012년 미국의 80억여 원 상당의 부동산, 2016년 또 한 차례에 걸쳐 10억여원 상당의 미국 부동산을 유증한 것에 이어 20207676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출연해 KAIST 개교 이래 최고액인 766억원을 기부한 이수영 회장의 통 큰 나눔은 세간의 큰 화제와 함께 감동을 선사했다.

단순히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이루고 나아가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평생을 모은 재산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결정이 아니기에 기부자의 깊은 속뜻과 사연이 궁금해 질 수밖에 없다.

1936년생, 여든 중반의 나이를 넘긴 이 회장은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신문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0년까지 17년간 한국경제신문과 서울경제신문 등의 언론사에서 취재 현장을 누볐다.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인 1971년에 광원목장을 설립해 축산업을 시작했고, 1988년 부동산 전문기업인 광원산업을 창업해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으며 KAIST 발전재단 이사장으로서 여전히 여의도 회사로 출근하는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대 장학재단 이사장 시절 장학금 전달식(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서울대 장학재단 이사장 시절 장학금 전달식(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수영 회장 명예 박사학위 수락 연설 장면(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수영 회장 명예 박사학위 수락 연설 장면(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 회장은 앞서 1971년 서울대 법대 동창회 장학재단인 낙산장학회 이사로 활동했으며 동창회 및 장학재단 임원을 거쳐 2010년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2013자랑스런 경기인상을 수상하고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으로 봉사한 인연으로 법무부장관상을 받았다.

20132월에는 KAIST로부터 명예박사(과학기술학) 학위를 받았으며, 20181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했다.

작년 11월에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20 아시아 올해의 자선활동 영웅 15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 회장은 자식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기부하라고 말한다. 유산은 자손을 위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식이나 후손을 무능하게 만들 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2012년 KAIST 발전기금 약정식(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2012년 KAIST 발전기금 약정식(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베푸는 삶의 모습은 자식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믿고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은 이 회장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죽을 끓이고 떡을 해 이웃과 함께 나누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교회에서 들었던 P장로의 설교를 지금까지도 마음에 새기고 있으며, 누군가를 돕고 기부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미국이 한국을 도우러 올 때 구호 물품을 가득 싣고 왔다가 돌아갈 때는 빈 배로 갑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그렇게 좋은 일 하는 사람을 빈손, 빈 배로 보내겠습니까? 하느님은 그 배에 축복과 은혜를 가득 실어 보냅니다.”

이 회장 역시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왔다가 갈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인데 그 손에 축복과 은혜, 감사의 마음만 가득 실려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기자시절의 이수영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기자시절의 이수영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편견과 좌절, 도전으로 맞서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만연했던 시절. 명문여고에 서울대 법대라는 유리벽을 깨고도 이 회장이 넘어야할 편견과 좌절은 끝이 없었다. 어렵게 견습기자로 언론사에 입성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라인이 되어있었고, 대한민국 최고의 학벌은 열등감에 찌든 이들에겐 못마땅한 질시의 요건이 되었다. 윗사람의 피해의식과 동료 기자들의 따돌림은 입사 4개월 만에 짐을 싸게 했다.

기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이 회장은 다시 한국경제신문, 서울경제신문을 거치면서 앞뒤 보지 않고 더욱 치열하게 황금기를 보냈다. 그렇게 열심히 발로 뛴결과 특종상을 거머쥐기도 했으며, 재계의 모든 기업인과 격의 없는 친교도 나눴다.

17년 기자생활 동안 우리나라 재계의 거목들과 돈독한 인연을 만들기도 했으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절박한 이들도 만났다. 이 회장은 자신에게 온 인연들을 외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돕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열악했던 구로공단 여공들의 기숙사 문제 해결을 위해 미력하지만 힘을 보탠 일화는 이 회장이 기자의 소명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수성 전 총리와 함께(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수성 전 총리와 함께(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부당한 취급을 받거나, 불합리하게 고통당하는 사람을 못 본다는 이 회장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여권 신장과 여성의 법적 권익을 보호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생각을, 기자가 되어 조금이라도 실천 할 수 있었음에 스스로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해직기자가 된 이 회장은 기자생활 때 사용하던 주말농장으로 광원목장을 창업하고 본격적으로 목축업에 뛰어들었다. 퇴직금 500만원과 돼지 2마리, 한우 3마리로 시작한 광원목장은 이후 TV프로그램에 소개될 정도로 성공사례가 됐으며, 이 회장은 1984년 전국 새양축가상을 받은데 이어 새마을중앙회 전국 새마을 후계자 성공사례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피난생활의 잠시가 시골생활의 전부였던 이 회장이 성공한 목장주가 되기까지는 부단한 노력과 성실함, 실패에도 두려움 없는 도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8년 광원산업을 설립하고 여의도백화점이 입점한 맨하탄 빌딩 5층을 인수한 뒤 건물 최대 소유권자의 자격으로 맨하탄빌딩 관리단 회장이 된 이 회장은 1992년 안양에 있던 농장이 제2 경인고속도로 나들목으로 수용되자 2000년대 초반 미국에 진출해 LA 현지 건물을 소유하게 됐다. 맨하탄 빌딩 인수, 모래사업 등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지만 이 회장에게 이러한 변화무쌍한 상황들은 위기이자 기회였으며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KAIST에 기부한 LA 레들랜즈에 있는 소셜시큐리티 빌딩(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KAIST에 기부한 LA 레들랜즈에 있는 소셜시큐리티 빌딩(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두 번의 암을 이겨내며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는 이 회장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다. 실패와 좌절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용기를 내고,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때 먼저 챙겨야 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마음은 내 뜻대로 안 되지만, 몸은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몸의 기운이 살아나면 마음의 상처도 서서히 회복된다.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니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을 때 먼저 돌봐야 하는 것은 몸이다. 몸이 망가지면 마음을 회복하기도 어렵다며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은 내 선택의 총합이다. 어느 것 하나, 어느 한순간 다른 선택을 해서 지금의 이수영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반복하고 거쳤던 무수히 많은 선택의 순간, 내가 결정한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다. 재산을 모으고 KAIST에 기부한 것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매 순간 결정했던 선택의 총합이다. 201612월 기꺼이 100만 달러의 2차 기부를 한 것도 마찬가지다. 재산을 모으고 KAIST에 기부한 일이 후회할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 이수영 자서전 -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KAIST에 676억 원 역대 최고액 기부(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KAIST에 676억 원 역대 최고액 기부(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KAIST에 기부했습니까?

이 회장은 산업화가 시작되었던 1960년대, 공업화가 되었던 1970년대, 시장 경제가 활성화가 되었던 1980년대 등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일선 현장에서 직접 겪으며 일찍이 과학 발전이 곧 국가 발전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2020723KAIST 대전 본원 학술문화관(E9) 스카이라운지에서 열린 기부 약정식을 통해 평생을 일궈 모은 676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출연해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의 수익금은 ‘KAIST 싱귤래러티(Singularity) 교수지원을 통한 노벨상 연구 기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지난 2012년 첫 기부를 시작으로 KAIST와 인연을 맺은 뒤, 이듬해인 2013년부터 현재까지 발전재단 이사장으로 재임 중인 이 회장은 오랫동안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결과 KAIST는 우리나라 발전은 물론 인류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최고의 대학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라고 기부 배경을 밝혔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이어 우리나라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 석·박사 연구인력의 25%KAIST 출신이다. 2019314조 원의 매출로 국내 GDP16.4%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 경제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세계적인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KAIST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와 함께 세상만사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기 때문에 KAIST는 사명감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영재를 키워야 한다. 어느 대학도 해내지 못한 탁월한 성취를 이뤄내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이는 일에 이 기부가 뜻깊게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KAIST는 이 회장의 이 기부를 바탕으로 설립되는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의 지원을 받아 ‘KAIST 싱귤래러티 교수를 육성할 계획이다.

‘KAIST 싱귤래러티 교수제도는 과학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교수, 인류 난제를 해결하고 독창적인 과학 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교수를 선발해 지원하는 제도로, 미래 과학기술 및 산업 발전을 선도할 혁신기술과 학문적 독창성을 창출할 수 있는 우수 연구 인력을 확보하고 기술적 특이점 도래에 대비하기 위해 장기간의 연구 수행을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KAIST이수영 과학교육재단지원으로 세계 최정상급 과학자 배출을 위한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교내 연구진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싱귤래러티 교수로 선정되면 10년간의 임용기간 동안 연구비를 지원받고, 논문·특허 중심의 연차 실적 평가가 유예된다. 임용기간 종료 시 연구 진행 과정 및 특이점 기술 역량 확보 등 평가에 따라 지원 기간을 추가로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쁘다고 기부 소감을 밝히면서 대한민국의 미래와 나라를 위하는 뜻을 가진 분들이 기부 문화 활성화를 위해 더 많이 동참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서울대 법대 동기생으로 고검 부장 검사를 지낸 김창홍 변호사와 동창으로 만난 지 62년만인 2018년 80세를 넘긴 나이에 혼례식을 올린 이수영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서울대 법대 동기생으로 고검 부장 검사를 지낸 김창홍 변호사와 동창으로 만난 지 62년만인 2018년 80세를 넘긴 나이에 혼례식을 올린 이수영 회장(사진=카이스트발전재단)

전쟁 속에서의 피난, 4.195.16 같은 격변의 시절을 지나 산업화와 공업화를 거친 한국 경제성장의 한복판에서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보고 온 몸으로 겪어 온 이수영 회장. 기자, 목장주, 사업가로의 삶이 성공적으로 인정받기까지 그 배경엔 운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이 회장 일생의 모든 곳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과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사람 중심에서 세상을 보며,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 놓을 수 있는 크고 깊은 내면의 힘이 오늘날 이수영이라는 인물이 있게 한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서울대 법대 동기생으로 고검 부장 검사를 지낸 김창홍 변호사와 동창으로 만난지 62년만인 201880세를 넘긴 나이에 혼례식을 올린 이 회장은 최근 건강상의 어려움도 극복하고 햇볕 따사로운 보금자리에서 아내라는 또 다른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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