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기(시사문화평론가, 드림공화국 대표)
손진기(시사문화평론가, 드림공화국 대표)

[CEONEWS=손진기 칼럼니스트] 장영욱. 포항 제철소에 중장비 기사로 근무하는 47살의 건실한 사회인이다. 1997년 어느 날 영욱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당신 아버지를 데리고 있소사기꾼이거나 장난 전화인 줄 알고 끊으려 했다. 장영욱 씨의 아버지 장무환 씨는 그의 나이 27, 아들이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6.25 막바지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통지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47년 동안 꼬박 제사도 지내왔다. 저승에서 걸려온 전화다.

 

여기서 장무환 씨의 생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우선 결론적으로 장무환 씨는 45년간 북한에 갇혀 있었다. 그럼 어쩌다가 북한으로 가게 된 것일까? 장무환 씨는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한다. 국방경비대는 국군의 전신으로 1946115일 미군에 의해 창설된 군대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지금과 같이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였다. 먹고살 것이 넉넉하지 못한 시절 군대 가려는 장정들은 넘쳐났다. 장무환 씨도 집안의 입도하나 줄이고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 강릉 경비대에 지원 입대한다. 그런데 폐에 문제가 생겨 8개월 만에 제대하고 만다.

 

1950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장무환 씨는 또 입대한다. 그런데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으로 입대를 하게 된다. 장무환 씨의 고향이 경북 울진인데 북한군이 이 지역에 들어와 인민 의용군으로 강제 입대시킨 것이다. 북한의 인민 의용군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서 징집되어 북한 인민군으로 강제 편입하여 전장의 최전선에 배치해 총알받이 역할을 했던 군대다. 장무환 씨는 북한 인민 의용군으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금강산까지 간다. 몇 개월이 지나고 장무환 씨는 고향에 나타난다.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금강산에서 울진까지 걸어서 탈출한 것이다. 수백 킬로를 걸어서.

 

195211월 또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이번엔 국군이다. 장무환 씨는 입대 영장을 들고 부산으로 갔다. 약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허술하게 마친 장무환 씨는 참전하여 군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미군정시절에 한번, 북한 인민군으로 한 번 더 그리고 대한민국 한국군으로 세 번째 입대한 셈이다. 19537월쯤, 곧 휴전이 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장무환 씨는 희망에 부풀었다.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아들을 만나 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전쟁의 포화 속에 그를 견디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동부전선으로 출동하라는 전투명령이다.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최전방 지역. 당시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밤낮으로 치열하게 전투가 진행되었던 때였다. 장무환 일병 옆으로 수류탄 한 발이 떨어진다. 장무환 씨는 정신을 잃었다. 극심한 통증에 눈을 떠보니 중공군 총부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장무환 씨는 그대로 북한군 포로가 된 것이다.

 

그 후 일주일 뒤 1953727일 휴전이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포로가 된 지 47년 만에 장무환 씨는 북한을 탈출했다.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어 아직도 가슴에 살아있는 대한민국 국군 신분으로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여권이 없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나 대한민국 국군 포로 장무환인데

그런데요?”

국군포로 장무환인데 거기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을 탈출해서 지금 중국에 와있는데 거기서 좀 도와줬으면 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 없지요

한국대사관 아닙니까?”

맞는데요

내가 북한사람인데. 내가

~ 없어요~”

전화는 툭 끊기고 만다. 대한민국 대사관이 이래도 되는가?

전화는 끊겼는데 장무환 씨는 계속

나 국군 포론데.”

너무나 허탈하고 기가 막힌 상황. 98년 실제 당시 통화한 기록이다. 손을 바르르 떨며 수화기를 놓지 못하는 너무도 간절한 장무환 씨의 절규. 믿기 힘든 조국의 거절. 평생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장무환 씨는 믿었던 조국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력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로 한다. 당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취재팀과 포항에 살고 있던 아들과 조카가 한 팀이 되어 탈출 작전이 시작된다.

 

일명 장무환 일병 구하기!!

은신처에서 택시로 기차역으로 이동 항구가 있는 도시로 간 다음 배를 이용해 인천항으로 오는 작전을 세운다. 부인과 아들 조카와 함께 탈출의 긴 영정을 시작한다. 미리 준비해 놓은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장무환 씨가 못 가겠다며 소리를 지른다. 태어나서 한 번도 승용차를 타본 적 없는 장무환 씨는 차멀미가 견디기 힘들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여 두 시간을 달려 겨우 기차역에 도착. 기차역에는 중국 공안들이 쫙 깔려있다. 조카는 삼촌 장무환 씨에게 교육한다. 공안에게 잡히면 절대 말을 하지 마라. 벙어리 행세를 해라.

오후 45분 전. 여기저기서 공안들의 검문이 심해진다. 기차가 출발 직전 열차에 오르는 순간 중국 공안이 장무환 씨가 들고 있던 가방을 낚아챈다. 순간 그때 장무환 씨는 여기서 끝났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안은 아이고 영감님 좋은 여행 되세요하고는 가방을 들어 열차에 실어준다. 가슴이 덜컹하는 순간. 무사히 열차는 출발. 이제 인천 가는 배만타면 한국으로 올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여권이 없는 상태. 가족들은 장무환 씨를 은신처에 숨기고 먼저 귀국한다. 귀국한 가족은 우선 정부부터 찾아간다. 국방부의 대답은 데리고 못 옵니다.” 장무환 씨는 북한 주민이기 때문에 정부가 나설 수가 없다는 답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 조카에게 한 통에 전화가 걸려온다. “장무환 씨 조카분이시지요. 내일 정오에 남서울 호텔 로비로 오세요. 절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혼자 오셔야 합니다. ”

남서울 호텔 로비 12시 정각. 어떤 신사분이 조카에게로 다가와 안 주머니에서 여권 하나를 꺼내서 넘겨주고 아무 말도 없이 살아진다.

그렇게 손에 쥔 여권을 들고 중국으로 출발.

드디어 마지막 관문 중국 국제 여객터미널. 출국심사대에 선 장무환 씨와 조카. 출국심사 요원이 잠깐! 왜 입국 도장이 없는가?’ 중국에 들어왔다 나가려면 중국에 입국했다는 도장이 찍혀 있어야 하는데 미처 입국도장을 못 만들었던 것. 순간 당황한 두 사람. ~ 여기만 통과하면 되는데. 조카가 기지를 발휘한다. 정면 승부를 건다. ‘도장 안 찍은 게 너희 잘못이지 왜 우리한테 난리야~~’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한다. 실랑이가 30여 분 진행된다. 뒤에는 줄이 한없이 길게 늘어져 서 있고 배 출발 시간은 다가오고. 상황이 난처하게 된 출국심사 요원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도장을 쾅 찍어준다. 정말 가슴이 쫄깃해진다. 북한을 탈출한지 50일 만에 포로가 된지 45년 만에 고향으로 향하는 장무환 씨.

 

1998930일 무사히 인천항에 도착한 장무환 씨는 조사를 거쳐 금성 전투에서 실종된 장무환 일병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전사 기록을 삭제, 국립묘지에서 전사자 이름도 삭제하게 된다. 19981029일 포로 당시 소속 부대인 3사단 백골 부대에서 일 계급 특진과 함께 전역 신고를 하고 4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하게 된다. 세 번의 입대 탈출과 포로 그리고 또 탈출.

정말 상상도 못 할 기구한 인생. 4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장무환 상병은 형님도 만나고 부모 묘소에 성묘도 하고 아들과 부인과 함께 늦은 행복을 만끽하며 14년을 함께 살다 아내 박순남 씨가 먼저 하늘나라로 간다. 그 후 3년 후 점점 건강이 악화한 남편 장무환 씨도 아내를 따라간다.

 

우리는 장무환 일병의 스토리를 통해 분단의 아픔을 가슴에 담았지만 이러한 스토리가 아직도 6만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국군 포로 6만 명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81명의 병사만이 조국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만약에 이분들이 살아 계신다면 구순이 훌쩍 넘은 연세. 시간이 없다. 이분들이 고향에 올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은 미군 병사의 유해는 그렇게 열을 올리고 대대적으로 보도를 해가며 발굴하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다 포로로 끌려가 평생을 고생하는 우리의 형제병사들을 왜 정부는 나 몰라라 하는가?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이분들의 희생덕분이 아닌가? 도대체 남북 정상은 만나서 뭘 한 건가? 시간이 없다.

 

북한은 인민 해방을 남한은 자유수호를 명분으로 전쟁을 치뤘다. 같은 형제와 친척끼리 서로 총을 겨눴다. 그것도 모자라 외세를 서로 끌어들여 우리의 형제를 죽였다. 서로의 정권을 위해.....

그래서 지금 6만이 넘는 이들 포로들이 해방됐고 자유로운가?

우리는 누구를 위한 전쟁을 한 것인가?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이념 때문에 우리 민족 142만 명이 죽거나 행불되었다.

 

이제 이분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70주년을 맞이하는 6.25! 남북한은 이산가족과 남북 포로 문제부터 해결해야 진정성 있는 평화가 올 것이다.

 

2021, 이분들에게는 지금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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