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영화를 말하다
2001년 2월 3일에 개봉한 멜로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김대승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병헌과 이은주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동성의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그려내면서 충격적이기도 했다. 다만, 교사 현빈은 남학생 인우가 죽은 전 여자친구 태희가 환생한 것이기 때문에 동성애라고 보기에는 억측에 가깝다. 다만, 스크린 속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논란을 잠식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전지적인 시점으로 관객은 바라보기에 장면이 불편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에 이상한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져 말도 탈도 많았던 영화다.

 

 

추억 속으로
지정 관람가를 갓 넘긴 학생은 영화를 본 후 설레어 잠이 오지 않았다. 문을 열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집안으로 밀려 들어왔었다. 그만큼 그 순간이 생생하다. 거실에 누워 잠을 청할 때가 많았는데 배우들을 떠올리며 장면과 대사를 읊조리기도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유독 잊히지 않는 대사며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해서 한 줄에 담았다는 것에 감탄하며 흉내 내기를 즐겼다. 지나서 돌아보면 이 시기부터 글쓰기에 관심을 가졌다. 운동에 재능을 발휘하던 학생이었는데 수업시간마다 집중하지 못하고 연습장에 글을 쓰기도 했다. 영화가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비집고 들어왔다.
‘번지점프를 하다’도 내년이면 개봉한지 20주년이 된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처럼 느껴지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젊은 영화에 속하기 때문에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최근 이병헌이 출연한 영화를 감상하게 되면 지나간 세월이 야속하다고 할까? 거울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흘러간 시간, 그리운 이를 붙잡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故이은주가 출연한 이 영화 속에서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직도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대학 시절 이은주와 같은 학교에 다녔고 종종 학교에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가 소속되어 있던 연극영화과가 있던 건물을 서성였다. 비슷한 모습의 학생만 보면 미어캣처럼 고개를 쳐들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바라봤다. 예상보다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고 결국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하고 군 문제로 휴학계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갔었다. 입영 날짜를 기다리며 게임과 술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속보가 들려왔다. 배우 이은주의 사망 소식이었다. 컴퓨터 속 달력을 가장 먼저 봤다. 4월 1일은 당연히 아니었다. 사람 목숨으로 장난칠 언론도 아니지만 그만큼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2005년 2월 2일의 찜찜한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전역 후 다시 영화를 보았고 그들이 번지점프한 뉴질랜드로 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애잔함 아니 우울한 감정을 지우지 못해서 배낭을 챙겨 구례로 향했던 기억이 있다. 이병헌, 이은주가 올랐던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다정하게 서서 장난치며 내려다보던 풍경은 실제로도 너무 멋있었다. 한참을 머물며 사진 촬영을 했다. 취재를 위해서 자료수집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통제되어 선착순으로 볼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스크린 속 현실 속
한 달에 한 번 여행 겸 취재를 떠난다. 지친 일상을 보내다 생애 첫 수학여행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매번 설레는 순간과 마주한다. 이번 스크린 속 여행 역시 일행과 함께 떠났다. 바쁜 성수기 시즌을 끝내고 비수기에 접어들면서 선배가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며 평일에 함께 떠나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반가웠다. 날씨가 좋으면 오토바이 뒤에 태워 떠나면 되고 좋지 않으면 차에 오르면 될 일이다. 베트남에서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장기여행을 했었기에 각자의 여행 스타일도 존중할 줄 알았다. ‘번지점프를 하다’ 속 비운의 사랑을 쫓아 떠나던 날. 그들의 사랑에 신도 이입한듯 추적추적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행 내내 그치지 않고 내리던 비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쳤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주인공들이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날 역시 비가 내렸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과 달리 그들은 첫눈에 반한 사이다.
대학캠퍼스를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쑥스러운 감이 있었는데 일행이 있어서 “교정으로 향할까?”라는 생각도 했다. 극 중 이병헌과 이은주는 대학동문으로 캠퍼스에서 사랑을 키워나갔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비던 학교는 경원대다. 그는 국문과생으로 그녀는 조소과생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애하던 남자는 조소과 수업시간까지 몰래 숨어드는데 재미있게도 촬영 장소가 변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 조소과 내부 촬영은 서울 시립대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인상적인 장면도 제법 있지만 미리 학교에 취재요청을 보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유독 강렬했던 두 장면을 찾아가기로 했다.
“젓가락은 시옷 받침인데 숟가락은 왜 디귿 받침이야?” 등산을 갔다가 비빔밥을 먹으러 들어간 이은주가 국문과 학생인 이병헌에게 물었다. “4학년 때 배우는 거라 잘 모른다.”는 답변으로 얼버무리는 코믹한 장면을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장대소하며 식사를 즐기던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다정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촬영된 장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에 위치한 마곡사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김구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를 죽인 후 인천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곡사에 진입하기 전 계곡을 따라 위치한 어느 음식점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절에 들러 사진을 찍은 후 절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정확하게 그 음식점을 알지는 못한다고 한다. 이유는 계곡 정비사업을 시행하면서 계곡을 따라 늘어선 음식점들이 철거가 많이 되어 지금은 없어졌을지도 모른겠다는 것이다.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급격히 변화하는 이 땅에서 당시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수소문하다가 가장 닮은 장소를 찾아 머물며 능청스러웠던 그들을 상상할 뿐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맛있는 점심으로 어루고 달래야 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비빔밥과 파전 막걸리를 시켰고 운전을 해야 했던 일행을 약 올리며 혼자 걸쭉히 술을 들이켰다.

 

 

다음 촬영지는 가장 기대되었던 갈음이해수욕장이다. 태안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접근이 쉬운 곳은 아니다. 식사를 오래 했던 이유도 일몰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기다리기 위해서인데 이도 얄미웠던 날씨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번지점프를 하다’ 속 가장 아름다운 명장면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국문과 MT가 아닌 조소과 MT를 따라간 극 중 이병헌은 무리를 이탈해 산책을 즐기는 이은주를 몰래 따라간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걷고 결국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양 체육 시간에 배운 왈츠 춤을 그에게 가르쳐 준다. 해 질 녘 해안가 숲에서 카메라 역광으로 비추어진 두 배우는 영화 최고의 명장면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손을 맞잡은 남녀는 여자가 흥얼거린 쇼스타코비치의 ‘Jazz Suite No.2 – Waltz’에 맞춰 춤을 이어나가고 곧이어 원곡과 섞이며 낭만으로 보답한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해졌던 명대사.
“손이 차가워요.” “저 원래 손이 차요. 마음이 뜨겁거든요.”
감상에 젖어 결국, 뷰파인더를 스크린 삼아 카메라 앞에 손을 들고 왈츠를 흉내 내보았다. 우울했다. 이상형이었던 배우 이은주는 하직하여 승천했고 그리움으로 남은 팬의 마음은 공허했다. 갈음이해수욕장에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덩그러니 해변에 자리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봤다면 꼭 그 나무와 닮아 보이지 않았을까?
쓸쓸함이 사무쳤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몇 번이고 이 장면을 돌려보았다. 비디오였으면 필름이 늘어나지 않았을까?

 

 

여행의 시간
공교롭게도 이전 기사들 모두 강원도가 배경인 영화들이었다. 계절적 분위기 때문에 선택한 영화들이었는데 의도한 듯하여 지인들에게 오해를 많이 받았다. 다른 곳이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쫓기다가 서울과 충청도 일대에서 촬영된 ‘번지점프를 하다’를 선택하게 되었다. 계절적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배우들 의상이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추운 겨울 따뜻하고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독자들을 녹이고 싶었다. 아쉬운 점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취재를 떠난 날부터 비가 내렸고 옷이 다 젖어 추위에 떨며 촬영을 이어나갔다. 일행의 도움이 없었다면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다분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무정했고 영화 속 우아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전혀 잡아내지 못하여 낙담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해수욕장에서 일몰을 배경으로 이병헌, 이은주가 왈츠를 추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스크린 속과 달리 비수기인 만큼 갈음이해수욕장은 정비가 되지 않았었고 장면을 비교하며 찾은 장소는 소나무 사이로 현수막을 걸었던 흔적과 평상이 가로막아 도저히 촬영이 불가했다. 일몰을 기다려볼까도 생각했지만 우중충한 날씨에 가려져 총체적 난국이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면 그게 인생이겠냐는 최면을 걸며 촬영을 마무리하고 돌아섰다. 숙소에 돌아와 근처에 사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고 몇 년 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취재의 아쉬움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들의 미소가 어루만져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시절 과거로의 회상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누볐던 캠퍼스로 인도했다. 다만, 우리는 이병헌, 이은주가 될 수는 없었다. 사랑을 차버리고 떠나간 이름을 부르며 서로 약 올리기 바빴다. 철없던 시절이었는데 모이니 지금도 여전했다. 그게 또 情이 아닐까?

기자의 여행 노선을 남긴다.
마곡사 – 갈음이해수욕장 – 안흥성 – 신진도 – 마도 – 몽산포 - 태안 마애삼존
불 – 백화산 – 아산만 방조제

 

글 김지훈 / 사진 김지훈, 송명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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