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영화 『젊은 날의 초상』

영화를 말하다

‘젊은 날의 초상’은 1991년 3월 16일 개봉한 곽지균 감독의 작품이다. 이문열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했으며 정보석을 중심으로 이혜숙, 배종옥, 옥소리, 전인택 등 배우들의 힘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조재현, 이희도, 신현준, 김승우 등 익숙한 배우들의 젊은 날을 엿볼 수 있는 깜짝 선물을 제공하기도 한다. 영화는 한 청년의 정서적 충동과 지적 모험을 통해서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려낸다.

극 중 정보석은 첫사랑 이혜숙이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 불륜 관계임을 알고 방황한다. 대학에 가서 이념의 차이로 친구들이 죽어가는 고통을 맛보기도 한다. 미모가 뛰어난 부잣집 딸 옥소리를 만나 사랑을 하지만 더 진전되지 못하고 자신과 다른 환경의 그녀와 이별하고 방랑길을 떠난다. 정보석은 고향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혜숙을 그리워하며 어느 시골의 술집 잡부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배종옥과 비운의 지식인 칼갈이 전인택을 만난다. 복수를 꿈꾸던 남자, 허무와 절망으로 고민하던 남자, 대학생을 사랑하게 된 여자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고 삶의 모습 속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기뻐하며 헤어진다.

 

추억 속으로

내가 영화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한 친구의 영향이 크다.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는 작은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영주라는 친구의 부모님께서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주말이면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손님들이 반납하는 비디오테이프를 감는 일을 하며 종일 후레쉬 맨, WWF, 각종 만화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헐크 호건이 나오는 WWF 비디오는 우리 때문에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였다. 당시 붉은색으로 연소자 관람 불가가 붙은 비디오는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는데 시간이 흘러 사춘기를 맞은 우리는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가져다주는 손님들의 테이프를 몰래 돌려보기도 했다. 많은 작품 중 하나가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 몇 번이고 정보석을 유혹하느라 한쪽 가슴을 내보이던 방은희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당시에는 재미도 야한 장면도 없다고 모여서 낄낄대던 철없는 시기였다. 자극을 원했던 우리는 젊은 시절 옥소리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미래의 여자친구를 상상하며 설렘을 느꼈다.

모두가 익숙한 일상에서 보내고 있을 때 영화 속 이희도의 죽음처럼 급한 소식이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영주가 세상을 떠났다는 한 줄의 문자가 그의 어머니에게서 날아온 것이다. 삶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차라리 우정과 사랑을 멀리하고 방랑자가 된 정보석이 지금은 부럽다. 그때의 난 허무와 상실감도 느끼지 못하고 죽은 듯 살았다. 돌아보니 영화 한 편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늘에 있는 친구가 그리운 밤이다.

스크린 속 현실 속

“무엇을 찾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영화 속 정보석이 했던 대사처럼 근원적 의문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무던하게 던지듯 “그냥” 여행을 한다고 말하겠지만 누구나 그렇듯 삶을 진지하게 통찰하려고 하는 시기가 있다. 이번 여행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살을 긁으며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눈으로 가득한 길. 그 위를 걸어가는 인물들. 이 영화에서 유독 잊히지 않는 이미지다. 그들이 밟던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했다. 눈이 내리길 기도했다.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로 접어드는 12월의 어느 날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왔다. 강원도 일대에 많은 눈이 내렸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고 부랴부랴 사촌 동생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모래시계’ 편 때 함께 움직이며 1, 2월에는 차갑고 삭막한 이미지를 연상하는 영화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눈이 내리면 오토바이 여행은 위험하니 자신을 불러달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눈을 뜬 우리는 중앙대로 향하려고 했으나 서울에 진입할 시간대면 출근 시간과 맞물릴 거 같아서 강원도로 바로 떠나야 했다. 중앙대를 방문하려고 했던 이유는 영화 초반부 대학교정 장면들이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정보석과 옥소리의 로맨틱한 첫 만남과 격렬히 언쟁하고 시위했던 주인공과 친구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곳이다.

1박 2일 동안 영월, 태백, 강릉, 평창, 양평 일대를 오갔는데 ‘젊은 날의 초상’의 경우 대부분 평창에서 부분적으로 서울, 양평 등에서 촬영되었다. 그 중심으로 가고자 했기에 또 다른 하루의 밤을 호텔에서 보내고 이른 아침 삼양목장으로 향했다. 이 영화의 촬영지에서 큰 충격을 남길 곳이라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정보석이 나무 아래서 설산을 내려다보는 명장면을 어렴풋이 떠올릴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름답고 멋지기 때문이다. 지금 삼양목장은 각종 SNS로 겨울왕국 현실판이라며 유명해진 장소다. 그렇다 보니 이 나무 한 그루는 그냥 들러도 들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이 되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위치하다 보니 대부분 추운 날씨를 피해서 바로 정상 전망대로 올라가는 차로 가득했다. 오히려 전세를 내고 촬영을 할 수 있는 천운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누군가는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가 된다. 여행의 일부는 아닐까? 지금은 나무에 보호대가 둘러져 영화 속 풍경을 재현해내기가 쉽지 않다. 눈으로만 덥혀있던 산도 풍력발전단지가 생겨 영화 속 장면과 비교했을 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그곳에 서서 정보석이 되어보라고 소리쳤고 찰나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았다.

차에 올라 추위에 얼은 몸을 녹이고 향한 곳은 보건소였다. 다시 만나지 못할 거 같았던 정보석과 이혜숙이 재회한 장면이 촬영된 장소가 평창보건소 도암지소이기 때문이다. 난감한 것은 도암지소로 불리던 보건소가 없어졌는지 용산보건소로 안내를 해주었고 이름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영화 속 장면과는 너무 달랐다. 도암이라고 불리는 지명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아니라고 직감했다. 지나온 평창보건소가 오히려 영화 속 보건소와 닮은 점이 많았다. 하지만 신식으로 바뀌어 촬영지라고 하더라고 맛을 살리기에는 약했다. 보건소를 찍고 의미부여를 한다는 것보다 멋진 풍경을 노출하는 욕심이 앞섰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평창과 멀어졌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출발이다.” 영화 속 명대사가 쏟아졌던 해변을 찾고 싶었지만 도통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눈 곳이 소설의 배경이라면 대진 그러니깐 포항이라는 것을 짐작하지만 영화라면 달라진다. 꼭 소설 속 공간에서 촬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창 일대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에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산을 넘는다고 한다면 강원도 고성의 대진 바다로 설정 가능하다는 흥미로운 상상도 해봤다.

이제 여행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양평 두물머리를 찾아갔다. 영화 속에서 이희도의 마지막 길을 담았던 장소다. 영원할 거 같았던 우정은 한 줌의 재가 되어서 강으로 뿌려졌다. 해가 질 무렵 도착했던 만큼 발걸음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전날 순식간에 해가 넘어가서 평창 멍에 전망대에서 좋은 사진을 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도의 차이는 나지만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음을 직감했다. 두물머리는 아름다운 명소다. 데이트 장소이자 가족 나들이 장소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아서 촬영하느라 고생했다. 배신, 상실 그리고 허무가 깃든 영화적 장소이지만 이곳을 방문한 이들의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 유지했던 90년대 초와 달리 지금은 잘 정비되어 관광지 느낌을 물씬 풍긴다. 뉘어가는 태양을 쫓아 사진찍기 바빴던 시간이었다.

 

여행의 시간

눈이 내려앉을 겨울 동안 기획한 영화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강원도였고 특정 지역은 사라져 앞으로 볼 수 없을 수도 있었다. 1박 2일 동안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륜차를 타고 취재 다니는 만큼 겨울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다음 편 촬영지는 대부분 강원도 산골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차를 타고 부지런히 달려야 했다. 고도가 높은 한적한 고갯길에서는 빙판길에 차가 미끄러진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도심에서 일상 대부분을 보내는 우리에게는 낯선 환경이 계속되어 고생을 많이 했다. 이틀의 고생은 두 달을 안락하게 만들 것이기에 상쾌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삭막한 배경을 그림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사라진 광산, 그 속에서 터전을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다음 이야기도 인쇄되는 순간을 기다려본다.

기자의 여행 노선을 남긴다.

상동 – 꼴뚜기 바위 – 중석 폐광 – 이끼계곡 – 두문동재 금대봉길 – 고한 – 사북 석탄 역사체험관 – 멍에 전망대 – 평창 라마다 호텔 – 삼양목장 – 대관령 보건소 – 용산 보건소 – 양평 두물머리

사진. 김지훈 김동규

글. 김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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