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기획하다
대한민국 1세대 디벨로퍼의 신화가 되다
디벨로퍼는 도시를 바꾸고 문주장학재단은 청년의 운명을 바꾼다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서울 테헤란로의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청년의 야성이 서려 있다. 칠흑 같은 가난의 터널을 지나 대한민국 부동산 개발(Developer) 역사의 새로운 챕터를 써 내려간 인물.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고 죽어가는 땅에 숨결을 불어넣는 '부동산의 연금술사'. 문주현 MDM그룹 회장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하지만 그 화려함 이면에는 치열했던 생존 본능과, 남들이 "No"라고 할 때 "Yes"를 외치며 전진해온 고독한 승부사의 기질이 깔려 있다. CEONEWS는 송년특집호 커버스토리로, 위기 때마다 빛을 발하는 '역발상 리더십'의 표상, 문주현 회장의 삶과 경영 철학을 심층 탐구한다.
■광야(曠野)에 선 야생마
성공한 CEO들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대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잘 닦인 도로를 세련되게 질주해온 '엘리트형'과, 거친 가시덤불을 헤치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온 '개척자형'. 문주현 회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후자다. 그것도 가장 거칠고 투박한 야생마에 가깝다. 전남 장흥의 가난한 농가에서 9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난 그는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졌다.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하고, 등록금이 없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해야 했던 청년 문주현에게 세상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결핍이 지금의 거인을 만들었다. 그는 말한다. "나의 스승은 가난이었고, 나의 무기는 헝그리 정신이었다"고. 오늘날 자산 규모 6조 원에 육박하는 거대 그룹의 총수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을 누비며 도면을 체크한다. 그의 몸에 각인된 '야생의 기억'이 그를 잠시도 안주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난은 그에게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교육'이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잃을 것도 없었고, 밑바닥에서 시작했기에 오를 곳만 남았다. 이 역설적 긍정이 그를 지금의 위치로 이끌었다. 많은 기업가들이 명문대 학벌과 화려한 경력을 내세울 때, 문 회장은 "가난의 대학"을 졸업했다고 당당히 말한다.
■승부사 기질, IMF 모두가 떠날 때 홀로 깃발을 꽂다
문 회장의 경영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1998년 창업 당시일 것이다. 당시는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공포가 대한민국을 집어삼키던 시절이었다. 멀쩡한 대기업이 줄도산하고, 거리에는 실직자가 넘쳐났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그는 퇴직금도 없는 상황에서 단돈 5,000만 원을 쥐고 7평 남짓한 오피스텔에 'MDM'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만류했다. 부동산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고, 사람들은 집을 팔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문 회장의 눈에는 다른 세상이 보였다. "위기는 곧 기회다. 남들이 공포에 질려 던지는 물건 속에 진짜 보석이 숨어 있다." 그의 '역발상(Reverse Thinking)'은 적중했다. 분양 시장이 붕괴된 상황에서 그는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미분양 아파트를 획기적인 마케팅으로 완판 시키며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부산 해운대 대우월드마크 센텀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업계는 "문주현이 만지면 미분양이 완판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의 성공 방정식은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철저한 시장 분석과 소비자의 심리를 꿰뚫는 통찰력, 그리고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뚝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IMF라는 거대한 파도를 피하는 대신, 그 파도 위에 올라타 서핑을 즐긴 셈이다. 한 부동산업계 원로는 "문주현은 시장이 얼어붙었을 때 오히려 더 뜨거웠다"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은 천부적"이라고 평했다. 이는 오늘날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수많은 청년 기업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두가 두려워할 때 용기를 내는 자만이 진정한 승자가 된다는 교훈이다.
■단순한 건축이 아닌, '가치'의 창조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개발업자'에 대한 인식은 종종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곤 했다.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비싸게 팔아치우는 투기꾼 정도로 치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문주현 회장은 이러한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며 '디벨로퍼(Developer)'의 정의를 새로 썼다. 그에게 디벨로퍼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획자이자, 도시의 문화를 만드는 코디네이터다. 단순히 용적률을 꽉 채워 건물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이야기가 흐르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그 땅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가치는 천지 차이로 달라진다. 맹지라도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입히면 황금의 땅이 된다." 그의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MDM이 주도한 판교, 광교, 송도 등의 랜드마크 프로젝트들은 이러한 그의 철학을 대변한다. 그는 부지를 매입할 때부터 완공 후의 모습, 입주민들의 동선, 상가의 활성화 방안까지 머릿속에 그린다. 시공사에 단순히 공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기획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상품성을 극대화한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문 회장은 단순한 시행사 대표가 아니라 도시 기획자"라며 "그가 손댄 프로젝트는 주변 지역까지 활성화시키는 파급효과가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MDM이 개발한 지역들은 단순히 건물만 들어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커뮤니티와 문화가 형성되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것이 MDM이 단순한 시행사를 넘어, 신탁, 자산운용, 캐피탈까지 아우르는 종합 부동산 금융 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는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디벨로퍼를 국가 경제를 견인하는 신성장 동력으로 격상시키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500원의 눈물, 600억의 희망으로
문주현 회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문주장학재단'이다. 2001년,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그는 5억 원을 출연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그의 형편이 넉넉해서가 아니었다. 사업은 여전히 살얼음판이었지만,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그 배경에는 청년 시절의 뼈아픈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고도 입학금 50만 원이 없어 등록을 포기하려 했던 절망감. 그때의 비참함이 그를 평생 따라다녔다. "내가 돈을 벌면, 돈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은 없게 하겠다"는 다짐은 그의 인생 목표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문주장학재단의 출연금은 600억 원을 넘어섰고, 수천 명의 학생이 혜택을 받았다. 그는 장학생들을 단순히 수혜자로 대하지 않는다. 매년 장학증서 수여식에 직접 참석해 학생들의 손을 잡고 "너희들은 빚진 게 아니다. 나중에 성공해서 사회에 갚아라"라고 격려한다. 한 장학생 출신은 "문 회장님은 장학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꿈을 주셨다"며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난이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문주장학재단 출신 중에는 의사, 변호사, 교수, 기업가 등으로 성장해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들이 상당수다. 이는 단순한 기부가 아니다. 가난 때문에 꿈을 꺾어야 했던 '과거의 문주현'들을 구원하는 행위이자, 사회로부터 받은 기회를 환원하는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많은 CEO가 은퇴 후에나 생각하는 사회공헌을, 그는 치열한 전투의 한복판에서 실천해왔다. 이 지점에서 문주현이라는 인물의 그릇이 드러난다.
■디테일의 힘, 그리고 독서광 리더십
문 회장의 집무실에 들어가 본 사람들은 벽면을 가득 채운 메모와 지도에 압도된다고 한다. 그는 소문난 '메모광'이자 '독서광'이다. 아무리 바쁜 일정 속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즉시 메모한다.그의 리더십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섬세한 디테일'의 결합이다. 큰 방향을 결정할 때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지만, 실행 단계에서는 마감재 하나, 조경수 한 그루까지 직접 챙긴다. 직원들은 때로 그의 깐깐함에 혀를 내두르지만, 결과물이 나왔을 때 비로소 그의 혜안에 감탄하게 된다.
한 MDM 임원은 "회장님은 현장에서 타일 한 장의 색깔까지 직접 확인하신다"며 "그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MDM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만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문 회장은 주말에도 개발 현장을 찾아 공사 진척도를 점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직원들에게 "상상력을 가져라"라고 끊임없이 주문한다. 부동산은 굳어있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것이다. 시장의 변화를 읽고, 소비자의 욕망을 읽어내는 상상력만이 남들과 다른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지론이다. 그의 독서 편력도 남다르다. 경영서적은 물론 철학, 역사, 문학까지 폭넓게 섭렵한다. "책은 나의 멘토"라고 말하는 그는, 독서를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 이러한 지적 호기심이 그를 단순한 사업가가 아닌, 생각하는 기업가로 만들었다.
■멈추지 않는 도전, 영원한 현역
인터뷰 말미,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문 회장은 주저 없이 "글로벌 디벨로퍼"를 이야기했다. 국내 시장은 좁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 등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선 MDM은 한국형 디벨로퍼의 성공 DNA를 세계에 심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이제는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시점에도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그에게 은퇴란 없다. 도전할 목표가 있는 한, 그는 영원한 청년이고 현역이다.
"나는 아직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슴이 뛴다. 오늘은 또 어떤 프로젝트를 만날까, 어떤 땅이 나를 기다릴까. 이 설렘이 사라지는 날, 그때 은퇴를 생각하겠다." 그의 말에는 진정성이 묻어났다.
문주현 회장의 삶은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흙수저 비관론이 팽배한 이 시대에, 그는 "환경을 탓하지 마라. 길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라고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가 걸어온 길이 한국 부동산 개발의 역사였듯, 그가 걸어갈 길은 또 다른 역사가 될 것이다. 오늘도 문주현은 지도를 펼친다. 그리고 그 지도 위에 아무도 보지 못한 미래의 도시를 그린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인생을 걸었던 그 승부사의 눈빛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