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범 회장, '경영권 방어' 넘어 '가치증명'의 시험대에
[CEONEWS=최재혁 기자] 한국 자본시장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영권 분쟁으로 기록될 고려아연 사태가 막바지 국면에 접어들었다. MBK파트너스·영풍 연합과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의 지분 다툼은 단순한 경영권 싸움을 넘어 한국 자본시장의 지배구조 선진화, 오너 경영의 정당성, 기간산업 보호라는 거대 담론의 충돌로 확대됐다. 이 분쟁이 한국 재계에 던지는 메시지와 향후 과제를 짚어본다.
■명분의 충돌, 시작된 전쟁
이번 분쟁의 시작은 명분의 대립이었다.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는 영풍의 장형진 고문과 손잡고 "고려아연의 훼손된 거버넌스를 바로잡고 주주가치를 제고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최윤범 회장 체제에서 무리한 투자가 이뤄졌고 이사회가 제 기능을 못 한다는 것이 핵심 논리였다. 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바라는 소액주주들의 심리를 정확히 겨냥한 공격이었다. 실제로 고려아연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장기간 1배 미만을 기록하며 저평가 논란에 시달려왔다. 반면 최 회장은 이를 '적대적 M&A'이자 '약탈적 자본의 침공'으로 규정했다. 고려아연이 반도체, 배터리 등 국가 미래 산업의 핵심 소재를 공급하는 기간산업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핵심 기술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면 국가 경쟁력이 훼손된다"는 주장은 지역사회와 정치권, 여론의 지지를 얻는 강력한 방패가 됐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양측 모두 나름의 논리와 명분을 갖고 있어 시장이 판단하기 쉽지 않은 구도"라고 평가했다.
■네트워킹의 힘, 우군 연합 구축
이번 분쟁에서 최 회장이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네트워킹 리더십'이었다. 초기 수세에 몰렸던 국면을 뒤집은 것은 그가 구축한 '전략적 동맹' 덕분이었다. 현대자동차그룹, 한화그룹, LG화학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과 트라피구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최 회장의 우호 세력으로 가세했다. 특히 김동관 한화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과의 연대는 단순한 친분을 넘어선 '밸류체인 동맹'으로 평가된다. 이들 기업은 고려아연이 생산하는 니켈, 동박 등 배터리 소재가 자사 공급망에 필수적이라는 판단 하에 최 회장을 지지했다. 최 회장이 추진해온 신재생에너지, 2차전지 소재, 자원순환 중심의 신사업 비전이 재계에서 설득력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최 회장이 평소 구축해온 인적 네트워크와 사업 비전이 위기 상황에서 결정적인 자산이 됐다"고 평가했다.
■자사주 매입과 유상증자 논란
하지만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단행한 대규모 자사주 공개매수와 이어진 유상증자 시도는 양날의 검이었다. 특히 2조5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 발표는 시장의 강한 반발을 샀다. "주주 자금으로 경영권을 방어하려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금융당국도 제동을 걸었다. MBK 측에 강력한 공격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위기의 순간 최 회장은 빠른 결단을 내렸다. 유상증자를 철회하고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나며 "주주들의 뜻을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전략적 후퇴를 통해 명분을 회복하고 주주총회 표 대결을 준비하는 고육책이었다.한 금융전문가는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와 함께, 오너 리스크에 대한 경각심도 함께 남겼다"고 분석했다.
■재계에 울린 경종
이번 사태는 다른 대기업들에도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리 탄탄한 기업이라도 지배구조가 취약하거나 주주 환원에 소홀하면 언제든 거대 자본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오너 경영=절대선'이라는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제 경영권은 혈연이 아니라 실적과 주주 지지로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MBK파트너스는 비록 '먹튀 자본'이라는 프레임 공격을 받았지만, '지배구조 선진화'라는 화두를 던진 것만큼은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받는다. 한 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와 주주 환원 정책이 전반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승리 너머의 과제
이제 시선은 다가올 주주총회로 쏠린다. 국민연금의 선택과 소액주주들의 표심이 최후의 승자를 가를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기든 쉽지 않은 과제가 남는다. 고려아연은 막대한 차입금으로 인한 이자 부담을 안게 됐고, 분열된 조직 문화를 봉합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만약 최 회장이 경영권을 지킨다면, 이제는 '방어'를 넘어 '증명'해야 한다. 약속한 신사업의 성과를 숫자로 보여주고, 훼손된 주주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만이 이 지루한 전쟁을 끝내는 길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경영권 분쟁 이후 실적 개선과 주주 환원 확대가 없다면, 주주들의 지지를 계속 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 자본시장의 변곡점
고려아연 사태는 한국 기업사에 '주주 자본주의 본격화'를 알리는 변곡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더 이상 오너 경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한 신뢰를 받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기업들은 투명한 지배구조, 적극적인 주주 환원, 명확한 성장 전략으로 주주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것이 경영권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교훈을 이번 사태가 남겼다. 최 회장이 이 거친 파도를 넘어 '뉴 고려아연'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지, 아니면 주주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 무릎 꿇을지, 한국 자본시장이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