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김병조 기자] 광복 80주년 특집 기획연재 ‘적산기업의 어제와 오늘’ 두 번째 순서는 재벌이 된 적산기업들을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선경직물’ 직원이었던 SK그룹 창업자
SK그룹은 1953년 최종건 창업주가 적산 기업 ‘선경직물’을 불하받은 것이 그룹의 시초다. 최종건 창업주는 일제강점기 선경직물의 직원이었다. SK그룹의 시작은 직물회사였던 것이다.
선경 창업주 최종건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을 매입해 폐허가 된 그 위에 공장을 다시 세웠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옷 하나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국내에서 합성 직물을 생산한 기업이 선경직물이었다. 선경직물은 선경화섬, 선경합섬을 설비해 원사 생산에 이르기까지 수직계열화했다.
1973년 최종건이 사망함에 따라 동생 최종현이 경영권을 승계하고, 섬유에 머물지 않고 석유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해 주력 업종을 에너지/화학 분야로 바꾸었고, 1985년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조직해 정보통신 사업에도 진출했다.
1988년 최종현의 장남 최태원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사위가 되면서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획득하면서 최고의 이동통신 회사 SK텔레콤의 성장 기반을 만들었다.
현재 SK텔레콤과 SK이노베이션은 이동통신과 정유 사업에서 각각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동통신 사업이나 정유는 사실상 과점 시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시장 지배력은 실로 대단하다.
여기에다가 2010년 인수 합병한 SK하이닉스가 최근 고대역 반도체 메모리 시장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망하기 힘든 포토폴리오를 형성하며 재게 2위의 재벌이 되었다.
‘조선화약공판’ 다이너마이트 계장으로 일했던 한화그룹 창업자
한화그룹의 전신은 적산기업 조선화약공판(주)이다. 한화의 창업자 김종희가 생산부 다이너마이트계 계장으로 재직했고, 해방 후 지배인과 관리인을 거쳐 1952년 6월 12일 조선화약공판을 불하받은 것이 한화의 시작이다.
김종희는 조선화약공판을 모체로 1952년 10월 자본금을 늘려 한국화약(주)을 설립했다. 1955년 6월에는 화약제조 회사 4곳 중에서 유일하게 남한에 있던 조선유지(주) 인천화약공장을 정부로부터 인수해 1958년 화약류 수입대체를 달성했다.
1972년에는 정부로부터 방위산업체로 지정되어 국내 유일의 종합방산기업으로 발돋움했고, 1976년 서울프라자호텔을 열어 서비스 사업까지 진출했다.
1981년 김종희 회장이 사망하고 당시 29세였던 장남 김승연이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1982년 한국종합화학으로부터 한양화학 및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하고, 1985년 한양그룹으로부터 한양유통을 인수했으며, 1986년 정아레저타운 등 구 명성그룹 관광계열사들을 각각 인수해 재계순위 10위권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름은 한국화약(주)이었고, 풀네임도 한국화약그룹이었지만, 영문 이름이 Korea Explosive Group이라, 고위 관계자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측에서 이걸 남조선 폭파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그룹 이름을 ‘한화’로 바꾸었다.
한화그룹은 화약, 건설, 방산, 에너지, 오션, 무역, 기계, 금융, 유통,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 등으로 방위산업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고, 미국과의 무역협상에서 조선업 협력이 주요 의제가 되면서 조선 사업도 새로운 성장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
두산그룹 창업자 아들이 ‘소화기린맥주’ 관리인이 되면서 OB맥주 탄생
두산그룹의 모체는 구한말인 1896년에 창업주 박승직이 세운 ‘박승직상점’이다. 그러나 그룹으로의 성장 발판을 마련한 것은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이 적산기업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인이 되면서부터다.
1945년 10월 6일 박승직이 1933년 창립시부터 주주로 참여해 취체역(이사)으로 선임되어있던 소화기린맥주(주)의 관리인으로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이 취임했다. 박두병은 미군정에 의해 쇼와기린맥주의 지배인으로 선임되었고, 정수창을 영입해 대관업무를 맡겼다. 1947년 6월 소화기린맥주(주)의 상호를 동양맥주(주) 변경하였고, 상표도 Oriental Brewery로 바꾸었다.
1948년 7월 박두병은 동양맥주 취체역 사장에 취임했고, 1951년 두산상회를 설립해 18대의 트럭을 확보하고 동양맥주 불하경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1952년 5월 동양맥주(주)를 불하받는 데 성공했다. 이어 1953년 6월 (주)두산상회를 두산산업(주)로 개편해 동양맥주(주)의 총판으로 만들고, 동양맥주는 생산에 전담케 했다.
1954년 3월 상표를 단순화한 OB로 바꾸고 1956년까지 대리점을 13개소(1953년 기준)에서 32개소로 크게 늘려 OB맥주의 시장점유율을 33.5%(1954년)에서 57%로 상승시켜 크라운맥주를 추월했다.
두산그룹은 그러나 계열사인 두산전자가 1991년에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을 발생시켜 그동안 그룹의 성장 동력이었던 OB맥주, 코카콜라, 버거킹, KFC 등 소비재 사업이 소비자들의 불매운동 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그룹의 주력 사업이었던 소비재 사업을 포기하고 중공업 분야로 눈을 돌리게 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중공업, 플랜트 건설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지만, 건설업 분야의 위기로 뼈를 깎는 구조조덩을 거친 뒤 현재는 중공업과 로봇산업을 중심으로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제과업체와 제분업체 중에 적산기업을 소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