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기 (시사문화평론가/드림공화국 대표)
손진기 (시사문화평론가/드림공화국 대표)

[CEONEWS=손진기 칼럼니스트]1977420일 대낮에 쇄 망치로 건장한 남자 4명을 때려서 살해한 23세의 박흥숙 사건을 아십니까?

광주 한 구청 소속인 30살이 된 김씨는 여느 때처럼 출근하여 무등산 밑에서 동료 일곱 명과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일곱 명 중 네 명은 이 식사가 마지막 식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같은 시각 박흥숙은 무등산 적산골 해발 450m 지점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박흥숙은 이곳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41녀 중 둘째.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형마저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가장이 된 박흥숙은 어려서부터 전교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였습니다. 중학교도 수석으로 입학 했으나 입학금과 등록금이 없어 포기를 하고 맙니다. 원래 박흥수의 고향은 전남 영광이었습니다. 집안을 일으켜보겠다고 광주 무등산 산기슭에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을 박흥숙 혼자 흙과 판지를 끌어 모아 60일 동안 집을 짓고 6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박흥숙은 철공소에 취직하여 6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며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습니다. 어리지만 아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소년가장.

박흥숙이 준비한 또 하나의 시험.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 국가정의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자, 나 같이 못살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자. 고 결심. 일도 그만두고 사법시험 합격을 위해 하루에 20시간씩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박흥숙이 끔찍한 살인마가 되어버렸을까요?

1977420! 박흥숙은 점심을 먹고 땅굴을 파는 작업을 합니다. 무허가 움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언제 헐릴지 모를 불안감에 땅굴을 파서 집을 만들 생각을 했었던 겁니다. 구청직원이 집이 헐리지 않으려면 땅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해 줬기 때문입니다. 당시 항공사진에 찍히면 무허가 판자촌 적산가옥 등이 무참히 헐려나갔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광주에서는 전국체전이 열리기로 되어있고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무등산을 지나게 되어 각하가 내려다보고 저게 뭐야라는 말을 할까 봐 알아서 기었던 거지요.

점심식사를 마친 7명의 김씨 일행은 쇠망치를 들고 박흥숙의 집을 향했습니다. 일명 망치부대박흥숙의 집은 무참히 헐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을 지르려 합니다. 박흥숙은 지붕위로 올라가 제발 불만은 지르지 말아달라고 애원합니다. 철거반원들로부터 불을 안지르겠다고 약속을 받은 후에 박흥숙은 지붕위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거반원 망치부대원들은 약속을 어기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어머니가 안 된다고 소리치며 집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어렵게 남에 집일을 봐주며 모아놓았던 돈 30만원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박흥숙은 몹시 격분했지만 참았습니다. 울고불고 난리가 난 식구들에게 이 분들도 시켜서 하는 거야 이분들은 잘 못이 없어 이분들도 우리와 같은 서민들이셔라고 하며 달랬다고 합니다.

다음 집으로 철거하러 가는 철거반원들에게 박흥숙은 이야기 합니다. “그 마을은 제발 불 지르지 마세요. 병든 환자와 노인들이 많이 살고 게시거든요애원하고 매달리며 말했습니다.

얼마 후 그 마을에서도 연기와 시뻘건 불길이 피어오릅니다. 순간 박흥숙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개돼지만도 못 하냐 우리는 국민이 아닌 것이냐?~~” 철거반원들을 단숨에 제압하여 묶어놓고 사과하라고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라고 종용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과의 말 대신 우리도 시키니까 하는 거야. 사과는 무슨 사과야라고 대들었습니다. 박흥숙의 화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순간 망치로 4명을 가격하여 살해하고 증거의 인멸과 도주없이 순순히 자수했습니다. 그날 죽은 피해자들은 구청에서 고용한 박봉의 일용직이었습니다.

결국 비극의 현장에는 힘없는 서민들만 있었습니다.

사건 직후 지역신문사에 구청직원들이 몰려 와서 절대 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 달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합니다. 그 후 기사에는 박흥숙은 무당골에서도 가장 뛰어나 굿거리를 10여개를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수입이 많고 그동안 절약하여 광주시내에 집을 세 채나 샀다라는 가짜뉴스가 쏟아졌습니다.

당시 서울 주택에 32%가 무허가 판자촌 이였습니다. 당국의 관리들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폭동이 일어 날 것을 두려워했던 모양입니다. 그 후 재개발이 필요한 곳에 아파트를 지었습니다. 이 사건이 판자촌과 무허가 주택가 빈민촌에 재개발 사업에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빈민과 서민을 위한 재개발.

 

박흥숙은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죄 값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애쓰지 않고 살인 및 살인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박흥숙의 최후 진술서에는 저의 지난날의 죄를 뼈저리게 뉘우치며 저의 울분 때문에 아깝게 희생된 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나의 죄는 죽어 마당 합니다. 방 한 칸 의지할 때가 없어서 남에 집 변소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에 집 처마 밑을 들여다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나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기 어려우시리라. 나는 돼지 움막보다도 보잘 것 없는 집이지만 짓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은 모두가 이 나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써 있습니다. 박흥숙은 19801224일 성탄절 이브 사형이 집행되어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 했습니다.

나의 움막이 있었던 무등산 기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유언은 끝내 허가 받지 못했습니다. 나도 이 나라 국민이고 싶다는 박흥숙의 말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는 피해자였습니다.

 

지금 LH 주택토지공사의 재개발 지역 투기 사건으로 세상은 시끄럽습니다.

업무상 재개발의 정보를 미리 취득한 LH직원들의 투기! 이들이 망치를 들지 않은 망치부대원들은 아닐까요?

과연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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