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심층리포트 10] 세계경제는 지금,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
글로벌 CEO들이 던진 비명 시그널 한국 기업은 이미 임계온도에 더 가까워졌다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지금 글로벌 경제를 지배하는 감정은 '공포'도 '침체'도 아니다. 오히려 "조용한 위기", 그리고 "서서히 끓는 물 속에 빠진 개구리"라는 비유가 더 정확하다. 미국 포춘이 최근 글로벌 대기업 CEO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인터뷰에서 확인된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세계경제는 무너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천천히' 망가지고 있다." 숫자와 지표는 아직 정상처럼 보인다. 미국 고용지표는 견조하고, 소비는 둔화됐지만 추락은 아니다. 반도체·AI는 호황에 가깝다. 문제는 위기가 '서서히' 오고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조용한 위기 신호는 한국 기업에게 훨씬 더 높은 온도로 전달되고 있다.
■'끓는 물 속 개구리'… 글로벌 CEO들의 공통 인식
"개구리를 끓는 물에 넣으면 즉시 뛰쳐나온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고 천천히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삶아진다." 경영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 우화가 2025년 말 글로벌 경제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메타포가 됐다. 포춘이 인터뷰한 50여 명의 글로벌 CEO들은 놀랍도록 유사한 진단을 내놨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위험 요인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만성화된 고금리. "이제는 뉴노멀"이다. 미 연준은 금리를 내릴 의지가 없다. 인터뷰에 응한 미국 CEO들의 절반 이상이 "2026년까지 3%대 복귀는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시장은 여전히 금리 인하를 기대하지만, 구조적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려하면 5% 수준이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단순히 자금조달비용이 높아진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기업의 미래가치가 할인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투자 수익률(ROI)에 대한 기준이 근본적으로 재설정된다는 뜻이다. 한 유럽 제조업체 CEO는 "과거에는 7~8%의 수익률이면 투자를 집행했지만, 이제는 최소 12~15%는 돼야 이사회를 설득할 수 있다"고 털어놨다.
둘째, 지정학 충돌의 고착화. 美·中·EU, 3중 충돌이 일상이 됐다. 미·중 기술전쟁은 이제 산업별로 '세부 전쟁' 단계로 진화했다. 반도체·배터리·AI·희토류·바이오 등 공급망의 모든 지점이 리스크다. 한 반도체 장비 제조사 CEO는 "과거에는 중국 시장 진출 여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중국 시장에서 철수할 타이밍을 고민한다"고 말했다. EU는 제조보조금 패키지를 강화하며 '제3의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 탄소국경세(CBAM), 핵심원자재법(CRMA), 순제로산업법(NZIA) 등 규제와 보조금을 결합한 유럽식 산업정책은 사실상 '글로벌 시장의 파편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한 독일 자동차 부품사 CEO는 "우리는 이제 하나의 글로벌 시장이 아니라 세 개의 분리된 시장에서 각기 다른 전략을 실행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셋째, 소비의 급격한 이중화. "고소득만 버티는 경제"가 도래했다. 포춘 인터뷰에 응한 미국 소비재·유통 CEO 중 60% 이상이 "소비자들의 체력이 양극화되고 있다"고 답했다. 고소득층은 여전히 명품과 프리미엄 제품을 구매하지만, 중산층 이하는 저가 브랜드로 대거 이탈하고 있다. 월마트의 더그 맥밀런 CEO는 "우리 고객들은 1달러 단위로 가격을 비교하며 쇼핑한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한국의 내수 침체가 단순한 로컬 현상이 아니라 글로벌 트렌드의 일부라는 의미다.
넷째, 기업 투자심리의 붕괴. '확신의 부재' 시대가 왔다. 과거의 위기는 공포로 움직였지만 지금의 위기는 '무감각'으로 확산된다. 한 미국 제조업 CEO는 이렇게 말했다. "2008년에는 모두가 위기를 알았다. 지금은 위기인지 아닌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이것이 진짜 위기다." 실제로 S&P 500 기업들의 자본지출(CapEx) 증가율은 2023년 8.2%에서 2024년 3.1%로 급감했다. 기업들은 현금을 쌓아두고 있지만 투자는 미루고 있다. 이는 경제가 표면적으로는 작동하지만 미래를 향한 엔진은 꺼져가고 있다는 신호다.
■한국 기업이 더 위험한 이유
글로벌 CEO들이 느끼는 '서서히 끓는 위기'는 한국 기업에게는 훨씬 더 급속도로 전달된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특성이 '물의 온도'를 더 빠르게 올리기 때문이다.
첫째, 수출 의존도 70% 국가의 '외부 충격 민감성'이다. 한국은 GDP 대비 수출 비중이 40%를 넘는다. 제조업 비중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70% 이상의 경제가 글로벌 수요에 직접 연동돼 있다. 미국의 소비 둔화, 중국의 부동산 디플레이션, EU의 탄소·보조금 규제 등 어느 하나만 흔들려도 한국 제조업은 직격탄을 맞는다. 특히 반도체·자동차·배터리라는 3대 축이 모두 '지정학 변수'와 맞닿아 있다. 한 국내 대기업 전략실장은 "우리는 미국과 중국, 두 거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라며 "한쪽으로 기울면 다른 쪽에서 타격을 받는 구조"라고 말했다. 데이터는 이 위험을 뒷받침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4년 3분기 대중국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5.2% 감소했고, EU향 자동차 수출은 탄소규제 강화로 8.7%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독일의 대중국 수출 감소율은 2.1%, 일본은 3.4%에 그쳤다. 한국이 외부 충격에 더 취약한 구조임을 보여주는 지표다.
둘쨰, 고금리 장기화로 이는 한국 경제의 '최악의 조합'이다. 한국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5%로 OECD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고금리가 장기화되면 소비, 내수, 서비스업, 고용으로 이어지는 연쇄 타격이 현실화된다. 한국은행 데이터에 따르면 2024년 10월 기준 가계대출 금리는 평균 4.8%로, 2021년(2.9%)보다 1.9%포인트 높다. 이는 연간 약 18조 원의 추가 이자 부담을 의미한다. 이 돈은 고스란히 소비에서 빠져나간다. 기업 입장에서는 "해외 수요 둔화와 내수 부진"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된다. 한 유통업계 CEO는 "과거에는 수출이 부진하면 내수로 버텼는데, 이제는 둘 다 무너지고 있다"며 "이런 상황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라고 진단했다.
세재, 공급망 재편. 한국의 '낀 나라' 리스크는 치명적이다. 미국은 동맹 중심 공급망(Friendshoring)을 강화하고, 중국은 자국 중심 기술자립 전략을 가속한다. 한국은 어느 쪽에도 100% 탑승할 수 없다. 이 '중간지대'가 장기적으로 기업 불확실성을 키운다. 실례로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파운드리 공장에 440억 달러를 투자하면서도,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증설도 동시에 추진 중이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인디애나 공장을 검토하면서도 중국 우시 공장 가동률을 최대한 유지하려 애쓴다. 이는 전략적 명확성이 아니라 '전략적 모호성'을 강요받는 상황이다. 한 반도체업계 임원은 "우리는 양쪽 모두에게 '우리 편'이라고 말해야 하는 동시에, 양쪽 모두에게 의심받는다"며 "이는 엄청난 비용과 비효율을 낳는다"고 토로했다.
■글로벌 CEO의 공통 메시지, "위기는 조용한 순간에 온다"
포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는 "anticipation(선제 대응)"과 "resilience(복원력)"이었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데이터는 아직 위기를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둘째, 하지만 CEO들은 이미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CEO는 "위기의 신호는 재무제표가 아니라 고객의 행동 변화에서 먼저 나타난다"며 "우리는 고객들이 구매를 주저하고, 계약 갱신을 미루고, 더 많은 할인을 요구하는 것을 본다"고 말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많은 CEO들이 "투자를 줄이기보다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다. 아마존의 앤디 재시 CEO는 "경기 침체기의 투자야말로 경쟁자와 격차를 벌리는 유일한 기회"라며 "우리는 AI와 물류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오히려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역설적이다. 위기를 감지한 리더들은 방어가 아닌 공격을 선택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용한 위기일수록 대부분의 경쟁자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타이밍이야말로 시장 재편의 골든타임이라는 계산이다.
■한국 C-레벨에게 보내는 경고, "지금은 숫자보다 흐름을 봐야 할 때"
한국 기업의 CFO·CEO·CSO에게 이 조용한 위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재무보다 '전략의 설계'가 더 중요해졌다. 지금의 위험은 분기 실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업모델, 공급망, 인력전략, 자본배분에는 이미 금이 가고 있다. '끓는 물'은 조용하지만 치명적이다. 한 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지금 한국 기업의 재무제표는 여전히 견조해 보이지만, 3년 후를 시뮬레이션하면 절반 이상이 위험 구간에 진입한다"며 "문제는 그 3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온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둘째, 공급망 독립성·에너지·AI의 3대 축이 생존의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글로벌 CEO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투자 분야는 다음과 같다. AI 기반 생산성 혁신, 공급망 재설계와 다변화, 에너지 비용 및 원자재 안정성 확보. 이는 한국 기업의 취약지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특히 AI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AI를 적극 도입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생산성 격차가 2024년 15%에서 2026년 35%로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 국내 제조업체 CEO는 "AI 도입이 늦어지면 경쟁에서 영구히 탈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셋째, "민첩성(Agility)"이 가장 중요한 리더십 역량으로 부상했다. 조용한 위기일수록 느린 의사결정은 치명적이다. 이제 대기업 리더십은 '의사결정 속도'가 기업 가치를 좌우한다. 맥킨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의사결정이 빠른 기업(6개월 이내 주요 전략 실행)은 느린 기업(12개월 이상)보다 수익성이 평균 25% 높고, 주가 수익률도 40% 높았다. 한 국내 대기업 전략담당 임원은 "과거에는 완벽한 계획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70% 확신에서 실행하고 수정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의 '임계온도'는 이미 빨라지고 있다
지금 글로벌 CEO들이 말하는 위기는 겉으로 보이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는 버티고 있다. 기업도 버티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끓는 점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과정"이다. 한국은 그 속도가 더 빠르다. 수출·금리·공급망·내수라는 네 갈래 리스크가 동시에 가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위험한 것은 대부분의 한국 기업이 이 '온도 상승'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위기는 항상 같은 얼굴로 찾아오지 않는다. 조용히, 서서히,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2008년 금융위기는 리먼브라더스 파산이라는 명확한 시그널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빅 이벤트'가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지금은 숫자가 아닌 흐름을 읽어야 할 때다. 그리고 그 흐름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생존 전략은 늦어질수록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개구리는 물이 끓기 시작해야 위험을 안다. 그러나 CEO는 물이 미지근할 때 뛰쳐나올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CEONEWS는 앞으로 이 '조용한 위기'가 한국 기업에 어떤 방향으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어떤 리더십·전략·데이터가 필요한지 지속적으로 해부할 것이다. 물의 온도는 이미 올라가고 있다. 당신의 회사는 준비됐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