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철의 IR 리포트 17] SK하이닉스, AI 메모리로 '11조원 신화' 쓰다
분기 영업이익 사상 첫 10조 돌파 HBM 독주에 DDR5·eSSD까지 '전방위 성장'
[CEONEWS=배준철 기자] 반도체 업황의 부침을 온몸으로 겪어온 SK하이닉스가 드디어 '슈퍼 사이클'의 정점에 올랐다. 지난 10월 29일 발표된 2025년 3분기 실적은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영업이익 11조 3,834억 원. 창사 이래 처음으로 분기 영업이익 10조 원을 돌파한 이 숫자는, 단순한 실적 개선을 넘어 글로벌 AI 혁명의 한복판에서 SK하이닉스가 차지한 독보적 위상을 증명한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코로나19 특수가 끝나고 PC와 스마트폰 수요가 급감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폭락했고, 업계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그 암흑기에도 한 가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바로 'AI가 메모리의 미래'라는 확신이었다.
■HBM, 게임의 판을 바꾸다
이번 실적의 절대 주역은 HBM(고대역폭 메모리)이다. 챗GPT로 시작된 생성형 AI 열풍은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의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으로 이어졌고, 그 중심에는 AI 반도체가 있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AI 칩 제조사들이 더 빠르고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찾은 해답이 바로 HBM이었다. HBM은 여러 층의 메모리 칩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데이터 처리 속도를 극대화한 초고성능 메모리다. 말하자면 메모리 반도체계의 '슈퍼카'인 셈이다. SK하이닉스는 이 분야에서 압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미 2026년까지 주요 고객사들과 HBM 공급 계약을 모두 체결했고, 지난 9월에는 차세대 제품인 HBM4 개발까지 완료하며 업계 최고 속도 지원 준비를 마쳤다. 경쟁사들이 HBM3E 양산에 안간힘을 쓰는 사이, SK하이닉스는 이미 HBM4 시대를 열었다. 4분기부터 출하를 시작해 내년에는 본격적인 판매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는 곧 '기술 초격차'가 단순한 구호가 아닌 현실임을 보여준다.
■AI 특수, 메모리 전반으로 확산
더 흥미로운 대목은 AI 수요가 HBM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고객들의 AI 인프라 투자 확대로 메모리 전반의 수요가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AI 서버향 고용량 DDR5(128GB 이상) 출하량은 전 분기 대비 2배 이상 늘었고, 낸드 부문에서도 AI 서버용 기업용 SSD(eSSD)의 비중이 크게 확대되며 수익성을 끌어올렸다. 이는 AI 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맞물린 결과다. 최근 AI 산업은 모델 학습(Training)에서 실시간 서비스를 위한 추론(Inference)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추론 작업은 학습보다 더 다양한 서버 인프라에 분산돼 처리되는데, 이 과정에서 고성능 DDR5와 eSSD 같은 범용 메모리 제품의 수요가 폭증하는 것이다. 실적 수치가 이를 방증한다. 3분기 매출 24조 4,489억 원, 영업이익 11조 3,834억 원, 순이익 12조 5,975억 원. 영업이익률 47%, 순이익률 52%라는 경이로운 수치는 HBM 하나만의 성과가 아니다. D램과 낸드 전 제품군이 고르게 성장하며 만들어낸 '전방위 승리'의 결과물이다.
■재무 건전성, 미래 투자의 발판
호실적은 재무구조 개선으로도 이어졌다. 3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27조 9천억 원으로 전 분기 대비 무려 10조 9천억 원 증가했다. 반면 차입금은 24조 1천억 원으로 줄어들면서 회사는 3조 8천억 원의 순현금 보유 체제로 전환했다. 이는 단순한 숫자 개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반도체 산업은 천문학적 설비투자가 필요한 자본집약적 산업이다. 막대한 현금 확보는 곧 차세대 기술 개발과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전쟁 자금'을 손에 쥐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고객 수요에 대응하고자 최근 M15X 클린룸을 조기 오픈하고 장비 반입을 시작했다. 2026년 투자 규모는 올해보다 늘어날 계획이며, 선단공정 전환을 가속화해 공급 능력을 빠르게 키운다는 방침이다.
■2026년까지 수요 '올인' 확보
SK하이닉스가 확보한 것은 돈만이 아니다. 회사는 D램과 낸드 전 제품에 대해 2026년까지 고객 수요를 모두 확보했다고 밝혔다. 향후 1년 이상의 판매가 예약된 셈이다. 반도체 업계에서 이런 '선수요 확보'는 매우 이례적이다. 시장 변동성이 크고 가격 등락이 심한 메모리 산업 특성상, 장기 수요를 미리 확정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만큼 AI 메모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주요 AI 기업들이 전략적 파트너십을 잇달아 체결하고 데이터센터 확장 계획을 속속 발표하면서, 메모리 수요는 공급을 압도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황금기를 맞은 셈이다.
■기술 초격차, 지속 가능한 성장의 열쇠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경쟁사들도 HBM 양산에 속도를 내고 있고, 마이크론 같은 글로벌 업체들도 추격에 나서고 있다.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 프리미엄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기술 초격차'로 맞선다는 전략이다. D램에서는 최선단 10나노급 6세대(1c) 공정으로의 전환을 서둘러 서버, 모바일, 그래픽 등 풀라인업 제품군을 갖추고, 낸드는 세계 최고층 321단 기반의 TLC, QLC 제품 공급을 늘린다.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으로 시장을 선점하고, 그 격차를 계속 벌린다는 복안이다.
김우현 부사장(CFO)은 "AI 기술 혁신으로 메모리 시장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며 전 제품 영역으로 수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며 "앞으로도 시장을 선도하는 제품과 차별화된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AI 메모리 리더십을 공고히 하겠다"고 강조했다.
■AI 시대, 메모리가 답이다
SK하이닉스의 11조 원 신화는 단순히 한 기업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AI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메모리 반도체가 '산업의 쌀'에서 '산업의 두뇌'로 격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AI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데이터센터가 확장될수록, 메모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아무리 뛰어난 AI 칩이라도 빠르고 대용량의 메모리 없이는 그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 SK하이닉스는 바로 그 핵심 고리를 장악했고, 그 결과가 11조 원이라는 경이적 수치로 나타났다. 앞으로가 더 흥미롭다. 내년 HBM4 본격 출하, 선단공정 전환 가속화, 생산능력 확대까지. SK하이닉스는 이미 다음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AI 시대의 승자는 결국 메모리를 제패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SK하이닉스는 그 정상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