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엄문 시조 임의공 내성군 시향대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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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엄문 시조 임의공 내성군 시향대제 열려
  • 엄금희 기자 CEO NEWS
  • 승인 2019.10.2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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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어머니상에 엄홍길의 모친 이맹임 여사

 [CEONEWS=엄금희 기자] 영월엄씨 시조 임의공 내성군 시향대제가 19일 강원도 영월읍 영흥리 시조공묘역에서 엄상호 대종회 중앙종친회장을 비롯한 전국 및 해외 종친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뿌리를 찾는 영월 엄문 시조공 시향대제는 기자 또한 영월 엄문의 군기공파 충의공계 28세손이다. 엄기영 전 MBC 사장이 시조공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종친들을 반긴다. 

영월 엄문 대종회 행사가 시작되고 영월 엄문의 종친들이 자리를 잡고 행사는 4부로 진행되었다. 제1부에는 제례 습례로 집례관, 헌관, 축관, 제집사 전원의 제례봉행 습례 후 제2부에서 제례 전 행사가 진행되었다. 

제례 전 행사는 상견례와 공로패 수여 및 전국의 영월 엄문 일가의 꿈나무 학생들에게 엄문장학재단에서 중고대학생들 60여 명에게 3천5백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이어서 세계 최초로 8,000m 16좌 완등의 신화를 쓴 엄홍길 대장의 어머니인 이맹임 여사에게 '자랑스러운 어머니상'이 주어졌다. 현재 엄홍길 대장은 히말라야 보다 큰 희망을 휴먼재단을 통해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임원 소개와 엄상호 중앙종친회장의 인사말과 축사가 이어지고 제3부에서는 대제 봉행으로 시조 공모 제례와 중조단 제례가 진행되었다. 제4부에서는 헌관과 기념촬영이다. 행사는 시조공 시향 대제 참배 행사를 마치고 난 뒤 점심을 먹는다. 

영월 엄문은 누구인가? 조상인 영월 엄문은 시조공 임의공이 서기 742년~755년간에 정사로 부사인 신시랑과 함께 당나라의 파락사, 새로운 악장을 전하는 임무를 띤 사신으로 신라 35대 경덕왕 때 들어왔다.

시조공인 엄임의 공은 한나라 시인 부양, 엄자능의 후예이며 당나라 상국 화음의 일족이다. 시조공은 당나라 현종(제6대 임금, 재위:712년~756년)이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이를 주변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로 왔다가 정변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영월에 정착하여 우리나라 엄문의 시원을 이루게 된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내성군에 추봉하였고, 후손들에게 영월을 식읍, 나라의 공신에게 내리어 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였다.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영월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현재의 행정구역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행정마을에 시조공께서 직접 심었던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을 자랑하며 천연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경술국치와 8.15해방 때 동편의 큰 가지가 부러졌으며, 6·25한국 동란 때는 북편의 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대 이변이 있을 때마다 무언의 예시를 하고 있다. 1,200여 년이 넘는 수령으로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며 지금도 의연히 서 있다.

시조공은 세 아들을 두었고 첫째 태인은 검교 군기감윤 벼슬로 군기공파 아래로 13공계, 둘째 덕인은 복야 벼슬로 복야공파 아래로 28공계, 셋째 처인은 문과 벼슬로 문과공파 아래에 단일공계로 3공파 42공계의 자손을 두었다.

고려조의 수안공과 태사공 등 많은 현조에 이어 11세손인 유온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시조로부터 12세손인 충신 흥도는 영월 동강에 버려져 있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삼족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선피화 오소감심(僞善被禍 吾所甘心, 좋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한다 해도 달게 받겠노라)"하면서 단종의 옥체를 염장하여 엄문의 선산인 동을지에 암장한 만고의 충신으로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의공의 시호를 받는다.

근대의 인물로는 26세손으로 고종의 순헌엄황귀비로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진명여자중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 양정고등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26세손인 세영은 대사헌, 농상공대신을 지냈고, 28세손 항섭은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애국열사이다.

영월 엄문은 충·효·의·열을 바탕으로 많은 문·무관을 배출한 밝고 맑게 살아온 선비의 명문 족이다. 매년 양력 10월 셋째 주 토요일에 시조공 묘소에서 시향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행정마을에 심은 은행나무의 세잎을 엄문을 상징하는 무궁한 뜻을 담아 시조목으로 하고 있다. 시조공의 숭고한 정신을 오래도록 계승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은행나무의 잎을 정하였다. 

은행나무의 세잎을 정한 이유는 군기공, 복야공, 문과공 3형제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엄문 일가 화합과 무궁한 번영을 이루기 위함이다. 은행잎의 노란색은 평화를 상징하며 영원불변으로 무궁하고 찬란한 빛으로 이어가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우주를 상징하여 만들어졌다.

시조공이 직접 심었던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은행나무로 높이 29m, 둘레 14.8m, 수관폭은 동-서 16.5m, 남, 북 21.3m이다. 

매년 행정마을에서는 신령스러운 나무로 여겨 '은행나무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은행나무 속에 신령한 뱀이 살고 있어 동물이나 곤충이 접근하지 못하며, 어린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고 나무 앞에 정성을 들여 빌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의 이야기도 있다. 

영월의 은행나무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갖는 생물학적 가치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종교적·문화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이고 줄기는 지상 1.9m쯤 되는 곳에서 북쪽으로 3개 남쪽으로 6개의 큰 가지로 갈라져 있다. 이 나무의 원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지금의 줄기는 움싹이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은행나무는 성질상 뿌리목 부근에서 많은 움싹을 낸다. 

파락사로 같이 들어온 신시랑 과 함께 엄(嚴).신(辛) 양 성씨는 다 같이 영월을 본관으로 삼았고 서로 종씨(宗氏)라 부르게 되었으며, 양 성씨의 후손들은 시조의 유훈에 따라 혼인도 않고 의좋게 지내고 있다. 

엄흥도는 영월 엄문의 12세손으로 군기공파 충의공계로 무릇 '충(忠)'이란 마음의 중심'인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해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옳은 길을 가는 것이 충이다. 

사람이 바람의 흔들림을 쫓아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는 게 세상이라지만 역사 이래로 충을 받드는 사람이 더 많다.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며 모진 풍파를 받아낸 충의공 엄흥도는 존경받아야 할 인물이다.

정인지, 신숙주 등 세종과 문종의 성은을 입었던 이들조차 세조의 왕권 찬탈에 몸을 의지하는 현실에서 충의공 엄흥도가 보여준 의로운 용기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충의공 엄흥도는 부인 최 씨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지금의 청령포 앞마을인 방절리에 살았다. 계유정난으로 왕권을 빼앗은 세조는 1456년 음력 6월 22일 정인지, 한명회, 권람 등과 협잡하여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로 유폐시킨다. 

어느 날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든 충의공 엄흥도의 귀에 희미한 곡성이 들려왔다. 곡성이 청령포에서 들려온다고 여긴 엄흥도는 부인에게 "잠시 청령포에 다녀 오리다"라고 말하고 채비를 시작하자 부인은 "그곳에 가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합니다"라며 울며 만류했다. 

그러자 엄흥도는 "적막한 곳에서 홀로 지내는 어린 임금의 곡성을 듣고도 목숨이 두려워 모른 채 한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하겠소"라며 깊은 강물을 헤엄쳐 건너갔다. 

인기척에 울음을 그친 단종은 강을 헤엄쳐 건너오느라 흠뻑 젖은 엄흥도를 보고 "옛말에 초야에 선인이 있다더니 엄 호장을 두고 하는 말이구려"하며 "내가 꿈에 사육신을 만나 울던 중 이제 그대를 보니 육신을 보는듯하다"라며 기뻐했다. 

이후 엄흥도는 수시로 단종을 찾아뵙고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으며 단종의 서찰을 품고 한양에 있는 순정 왕후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청령포에서 생활한 지 두 달 만에 대홍수로 단종은 거처를 영월 읍내 관풍헌으로 옮기게 되는데, 마침 엄흥도는 관풍헌 관리 책임자로 임명돼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단종을 가까이 모시게 된다. 

어느 날, 단종은 외로움과 한을 달래기 위해 즐겨 찾던 자규루에 올라 목멘 소리로 시 한 수를 읊었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궐을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중에 이르렀구나…(하략)" 

이에 엄흥도는 한없는 충심에서 울어난 답시를 눈물로 노래하는데 쫓겨난 임금을 모시는 올곧은 마음과 나이 어린 임금의 끝 간 데 없는 불행을 애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늙은 촌부의 사심 없는 순수함이 알알이 배어난다. 

"육순의 작은 벼슬아치 충성을 다하고자 하거늘

왕께선 열일곱에 운이 어찌 그리 궁하신지요.

높고 높은 하늘엔 밤마다 마음의 별이 붉고

위태로운 이 땅엔 해마다 눈물 비가 붉습니다…"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밀어낸 후 멀고 먼 영월 땅에 유폐시키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세조는 유배 1년 4개월 만인 1457년 10월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차마 사약을 내놓지 못하고 꿇어앉아 흐느낀다. 이때 단종을 모시고 있던 공생 하나가 공을 세울 심산으로 활시위에 노끈을 이어 단종의 목을 졸라 절명시켰다고 전한다. 

역적으로 몰린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고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라는 세조의 엄명에 누구 하나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자 엄흥도는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수의와 관을 지게에 지고 아들 3형제와 동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집안사람들이 옳은 일인 줄은 알면서도 멸문지화가 두려워 만류하자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 설사 어떤 화를 당한다 해도 달게 받으리라"는 '위선피화 오소감심'이라는 말을 남기고 시신을 수습해 엄문 선산인 동을지산, 현재의 장릉에 암장한다. 

단종의 용포를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 김시습과 함께 초혼제를 지내고 3년 상을 치른 엄흥도는 아들 3형제와 뿔뿔이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다.

그 후 200여 년이 흐른 1669년, 송시열이 경연에서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등용토록 주청해 허락을 얻었다. 숙종 24년인 1698년에는 단종의 복위와 함께 엄흥도는 공조 좌랑으로 추증됐으며 영조 때인 1758년 다시 공조참판으로 가증됐고 1790년 정조는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등용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렸다. 

정조 15년인 1791년에는 왕명으로 엄흥도의 위패가 사육신 등과 함께 장릉 배식단에 모셔져 제사를 지냈으며 그 전통은 현재에도 단종제를 통해 이어져 오고 있다. 

순조 33년인 1833년 다시 공조판서의 가증 교지가 내려졌으며 1877년 고종은 그에게 '충의공'의 시첩과 교지를 내렸다. 충의공 엄흥도의 충절이 없었던들 어찌 오늘날의 영월이 있다고 어느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충절의 고장, 영월'은 충의공 엄흥도에 의해 비롯됐다. 충의공이 보여준 의로운 용기는 영월 엄문과 영월 주민의 마음속에 면면히 이어져 장릉의 낙락장송과 함께 한껏 푸르고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다. 

영조 2년, 1726년 어명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여각을 세웠으며, 영월 부사 윤양래가 쓴 충의공 엄흥도의 묘비는 "태화산이 무너지고 금수 동강의 물이 마를지라도 그대의 이름은 길이 후세에 남아 천추에 빛날 것이며 해와 별같이 멸하지 않을 것이다. …" 이렇게 적고 있다. 

1758년 영조 24년에 사육신 정열(死六臣正列)에 배향하고 창절사에 봉안치제 되었다. 그리고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 충신단에 배향치제하였다. 

장릉 추봉 300주년을 기념하여 충의공 엄흥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충의공 엄흥도 기념관'을 세웠다. 청계천을 산책하며 영도교에서 비운의 정순왕후를 생각했고, 김별아 작가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역사소설 '영영 이별 영이별'을 읽으며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랑에 마음을 애태우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읽었던가.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여산 송씨이다. 수양대군은 지인 송현수의 딸이 이슬 머금은 모란처럼 예쁘고 덕성이 두터워 조카며느리로 간택했다. 

그러나 야욕이 많은 수양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다. 단종을 왕좌에서 끌어내 노산군으로,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신숙주가 정순왕후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세조는 정순왕후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으로 보냈다.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가파른 벼랑과 시퍼런 강물 사이에 낀 영월 청령포에 유폐시켰다가 죽인다. 정순왕후는 사랑의 감미로움에 젖을 겨를도 없이 통분과 원한을 삭여야 했다. 

아침마다 낙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애간장 녹는 울음을 터뜨리며 한 많은 팔십 평생을 마쳤다. 정순왕후의 나이 81세였다. 정순왕후의 사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릉은 한 많은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의 불우한 일생을 보여주듯 초라하다. 

정순왕후는 승하 당시, 중종 16년 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상태로 부인의 묘로 초라하게 조성되었다가, 숙종 24년인 1698년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복되어 단릉의 형식으로 단장되었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 

장릉의 홍살문에 들어서 제일 먼저 만나는 배식단은 매년 단종제향을 올린 후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장판옥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인의 위폐를 모셔놓은 사당으로 1791년, 정조 15년에 세워졌다. 268명의 신위는 신분과 공적에 따라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 여인위로 분류했는데 여자 충신이 7명이나 된다.

단종비각엔 핏빛 같은 붉은 글씨로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端宗大王 莊陵)'이 음각된 비석이 있다. 무려 240여 년 만에 다시 왕으로 인정받은 단종의 능임을 세상에 알리는 비석이라 그 의미가 대단히 크다.

왕릉에 가면 신도와 왕로가 있다. 납작한 돌을 깔아놓은 두 개의 길을 참도라고 하는데 왼쪽의 신도는 신위가 지나가는 길이고, 오른쪽의 왕로는 임금이 가는 길로 일반인이 이용한다. 

정자각은 단종대왕 제향 시 제물을 차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한자의 정(丁) 자와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한다. 장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정자각이 정면에 있는 다른 왕릉들과 달리 장릉의 정자각은 측면에서 북쪽을 향하고 있어 제례 시 옆구리에 절을 하게 된다. 

영천은 장릉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제정(祭井)으로, 영천이라는 비석이 있다. 평소에는 물이 조금씩 샘솟다가 제사를 지내는 한식 때가 되면 물이 많이 솟아 '매한식시수출(每寒食時水出)'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조선 왕실의 법도에 따라 모셔진 다른 왕릉들과 달리 장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아 석물이 단출하다. 대신 장릉 주위의 울창한 소나무들이 단종을 향해 절을 한다.

조선 왕릉에서 '장릉'이라 불리는 능은 3개가 있다. 영월 엄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종의 능은 '엄숙할 장의 莊陵'이고, 김포에 있는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의 능은 '문채 장, 단락 장의 章陵'이며, 파주에 있는 인조의 능은 길장, 어른 장의 長陵'이다.

영월 엄문의 정신은 시조공 이래 충의공의 의로움이다. 그 의로움은 '충의공 엄흥도 기념관'에 현재도 온전히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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