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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CEO 68] 문주현 MDM 회장디벨로퍼계의 ‘미다스의 손’

[CEONEWS=이재훈 기자] 2019년 기해년 황금 돼지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CEONEWS가 '대한민국 리딩 TOP CEO'를 선정합니다. 이번 선정을 통해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 CEO들의 명예와 자존감을 앙양하고 그들의 업적과 노고를 치하하고 CEO PI의 본보기로 삼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문주현 MDM 회장

디벨로퍼계의 ‘미다스의 손’
'한국의 트럼프'라 불리우는 문주현 회장

황량한 토지에 상상력을 더해 가치를 창조하는 부동산 디벨로퍼는 도시를 변화시키는 마법사다. 땅을 맛있게 요리한다고 해서 ‘토지 셰프’라고도 불린다. 디벨로퍼인 문주현 MDM그룹 회장은 부동산 업계선 ‘한국의 트럼프’ ‘살아있는 이순신’으로 불린다.

상상력은 문주현 회장이 선택한 삶을 지탱해온 가장 큰 힘이다. 그에게 '상상'은 '인생의 판'을 바꿀 수 있는 도전과 용기를 표현하는 다른 말이다. 그에게서 듣는 '상상'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는 사람들 각자가 갖고 있는 자신만의 프레임을 깨야 큰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커다란 자본이나 배경도 없었지만 경험과 아이디어로 승부하겠다는 마음으로 창업하여 성장해온 20여년...상상을 현실로 만든 문주현 회장의 걸어온 길을 살펴보자.

◆ 생애

MDM 문주현 회장은 1958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전남 장흥의 갯마을에서 자란 그는 어려운 집안 환경으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겨울에 부르튼 손으로 김·미역을 뜯고 뒷산에 올라 땔감을 구해야 했다. 친구들보다 세 살늦게 광주직업훈련소(현 한국폴리텍대 광주캠퍼스) 기계과에 입학했다.

머슴 같은 생활을 도망쳐 들어간 직업훈련원 시절엔 하루 12시간씩 일하다 쇳물이 튀어 온몸에 쇳독이 오르기도 했다. 국비로 직원훈련원 가서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 전교 1등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1등을 해도 30~40년 후를 상상해보니 공장장밖에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또 한 번 인생의 판을 바꿔보자 해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20살 때 검정고시를 준비한 지 3개월 만에 합격하고 군대갔다온 후 27살에 경희대학교 회계학과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난 열등감이 많습니다. 촌놈에 고등학교도 못 나온 놈입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니 ‘빽’도 없고 내세울 게 없습니다. 오직 실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럽기는 커녕 소중하고 값진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과거를 숨기는 사람은 잘 만나지 않습니다.”

대학 졸업 후 나산실업에 들어가 죽기 살기로 일했다. 거기서 승부를 못 보면 인생 끝이란 생각으로 일했다. 일하다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31살에 입사해서 36세에 이사, 상무가 됐다.

1987년 여성의류 브랜드로 유명했던 나산그룹 안병균 회장이 갑자기 그를 부르더니 오피스텔 시장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산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한지 얼마 안된 터라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부동산의 '부'자도 모르던 '무(無)'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믿음으로 직접 발로 뛰며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발로 뛰며 낯선 오피스텔 시장을 조사하는 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다.

문 회장에 대한 주위의 의구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도전정신과 추진력을 보면서 의구심이 찬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그에게는 앞만 보고 내달린다는 '독일병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하지만 문 회장 역시 외환위기(IMF)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나산그룹 부도로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몇몇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장고끝에 그는 창업을 결심했다. IMF로 최악의 침체기였던 1998년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작은 오피스텔에서 MDM을 설립했다. MDM(MOON Development & Marketing)이 디벨로퍼 1위로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2008년 닥친 금융위기 때 수많은 부동산개발회사들이 도산했다.

문 회장은 “판교, 광교 분양 때도 직원들에게 말은 못했지만 최악의 카드를 준비해야 할 정도로 힘들었다”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등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고 경기흐름이 바뀔 때마다 주변에서 팍팍 쓰러졌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평범한 시골 청년은 20여년뒤 대한민국 1위 디벨로퍼업체 회장 자리에 올랐다.

◆ 경영활동의 공과

처음부터 디벨로퍼를 꿈꾸다.

MDM은 괄목상대할 정도로 성장했다. MDM은 2002년 매출 142억 원, 영업이익 72억 원을 올렸다. 그런데 2013년 매출 3181억 원, 영업이익 665억 원을 기록했다. 10년 동안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20배, 9배 성장했다.

2007년 '부산 월드마크 센텀'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개발사업에 나선 후 판교, 송파, 광교, 수서, 마교, 위례, 상암DMC, 삼송, 부천 중동, 동탄을 비롯해 2017년 원흥역 푸르지오시티 사업까지 직접 시행한 프로젝트를 모두 성공시켰다. 문회장은 MDM 설립 20년 만에 연면적 94만 평, 총 분양 매출액 11조 원의 개발사업 시행 실적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부동산기업으로 성장성장시켰다.

특히 2010년 금융공기업인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해 부동산과 금융을 결합한 국내에서는 새로운 비즈니스 플랫폼을 구축했다. 이후 리츠 AMC 인가, 여신전문 금융업인 한국자산캐피탈 설립, 자산운용사인 한국자산에셋운용을 설립해 부동산 개발·신탁·리츠·캐피탈·자산운용을 수직계열화한 종합부동산금융그룹을 완성했다.

2017년에는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거캐피탈(Gaw Capital)과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도 체결해, 해외 부동산 개발, 투자 등 글로벌 비즈니스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디벨로퍼를 꿈꿨다. 하지만 밑천이 없었다. 그가 가진 건 아이디어와 열정, 도전정신뿐이었다. 일단 분양대행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외환위기는 오히려 기회였다.

미분양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건설사들이 MDM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 분양대행에는 관심이 없었다. 상품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시켰다.

분양대행업이지만 건설사를 빌려 사실상 디벨로퍼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시장의 욕구를 정확하게 읽는 그가 구상하는 상품은 경쟁력이 높았다.

​“상품이 좋으면 마케팅은 끝난 겁니다. 그런 면에서 디벨로퍼는 ‘전략가’라고 생각합니다. 전략에 따라 전쟁에서 승패가 갈리잖아요? 다만 그땐 분양대행사였으니 현대건설, 포스코건설의 갑옷을 입고 싸울 뿐이었습니다.” 라고 문회장은 이야기 했다.

문 회장은 상품 기획력을 무기로 수수료도 다른 대행사보다 비싸게 받아냈다. 이때부터 MDM은 4만여 가구를 팔아 치우는 성과를 올렸다. 분양가로 환산하면 16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PF(Project Financing)로 금융기관을 설득​

MDM은 다른 디벨로퍼와 달리 시공사의 보증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이끌어내는 점도 차별된다. 이렇게 자체적으로 프로젝트파이낸싱이 가능한 것은 MDM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수익성이 높기 때문이다.

부산 월드마크 센텀 개발 사업을 할 때 디벨로퍼로서 처음으로 시공사 지급보증 없는 PF(Project Financing)를 했다. 최초 성공 사례다. 이 내용이 현재 대학원 교과서에 나온다. PF는 프로젝트를 보고 돈을 빌려주는 것인데 우리나라 금융회사는 후진적으로 반드시 담보를 잡거나 시공사 지급보증 등을 요구했다.

프로젝트를 보고 성공할 것 같으면 돈 빌려주고 아니면 안 빌려주면 되는데 왜 보증을 서라고 하는지, 그것은 담보대출이고 관행이라고 애기하는데 PF가 아니다. 은행을 설득해서 시공사연대보증 위주의 모델을 탈피해 디벨로퍼가 주도하는 PF 시장을 만들었다.

문 회장은 직접 은행과 담판했다. 차라리 시공사연대보증에 따른 비용을 줄여 발생한 이익을 은행과 나누어 디벨로퍼와 금융이 사업의 헤게모니를 잡자고 설득했다. 문 회장에 따르면 MDM은 대출을 만기 이전에 갚지 않은 적이 없다. 자체 프로젝트파이낸싱은 MDM이 불필요한 비용을 쓰는 것을 줄여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부산 집값이 평당 800~900만원이었는데 문회장이 최초로 2배인 1600만원을 받았다. 주위에서 ‘문주현 회장이 돈 번거 말아먹으려고 마지막 용을 쓰는 구나‘라고 빈축도 샀다. 일반적으로 계약금 10%인 시장에서 계약금을 20%로 받으면서도, 3개월 만에 100% 분양이 됐고 이 프로젝트로 번 돈으로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고, 지금 엠디엠 그룹의 토대가 됐다.

일반적인 회계법인 시장가격 조사를 보면, 주변시세의 +5~10%로 가격을 책정하는데 이 기준이 맞는건지 따져보았다. 가치를 왜 주변과 비교하는지, 좋은 위치, 좋은 상품인데 옆의 가격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20억짜리 집들이 3개월 만에 다 팔렸다. 집이 명품임을 강조하였던 것이 먹혀 들어갔던 것이다.

판교,송파,광교,수서,위례등 연이어 성공 이끌어

문 회장이 디벨로퍼한 판교 푸르지오는 월드마크다. 분양가 상한제로 인해 사업자가 수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민간임대분양을 통해 사업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문정동 송파 푸르지오 시티도 있다. 인접한 프로젝트 대비 4배의 수익을 올렸다. 유사한 상품, 유사한 사업이지만 이렇게 이익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지하 1층 개발 시 썬큰을 통해 기존 지하상가 대비 가치를 극대화 한 점과 부대시설 고급화를 통해 상품의 가치를 높인 것이다.

광교 푸르지오 토지 리턴제가 도입되었다. 금융위기 당시 토지매각이 원할 하지 않던 경기도시공사에서 계약 후 1년 후 개발이 무산될 시 계약금을 돌려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토지를 매각했다. 이것을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계약금을 대출받아 토지를 매입했다. 이후 49층의 랜드마크 주상복합을 기획하니, 국내의 대표적인 시공사들이 수주전을 벌일 정도로 이슈가 되었다.

문 회장이 상품을 기획할 때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땅의 형태였다. 용적률은 지상 용적률만 계산하고 지하는 계산 안한다. 반지하 상가를 다 팔아서 650억원이 나왔다. 반지하라서 금싸라기 땅인 것이다. 반지하를 1층으로 만들어 돈 벌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전공에 대해 정말 집중해서 미친 듯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계탑도 만들었다. 로드상가에 만남의 광장, 분수, 아이들 놀이터 등을 갖춰 랜드마크가 됐다.

◆ 경영철학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성공하려면 생각이 남달라야 한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절대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자기 인생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가다 보면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고 재미없고 돈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스톱을 해야 한다. 버스를 잘 못 탈수도 있지만 알았을 땐 바로 내릴 줄 아는 용기가 중요하다.

또한 그의 좌우명 중 하나는 ‘빚지고 살지 말자’다. 대학 3~4학년 때 너무 가난해서 장학금 받기 위해 자기 소개서를 썼는데, 어렸을 때 시골에서 겪은 일과 직업훈련원 얘기를 썼더니 서울대와 한양대 학생만 주는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스스로 ‘세상에 아무 조건 없이 장학금을 주는 좋은 사람이 있구나, 세상에 빚을 졌으니 꼭 후배들에게 10~100배까지 갚겠다’고 다짐했다고 회상한다.

창업 3년만인 2001년 10억 원이라는 돈을 벌어, 절반인 5억 원을 출연해 <문주장학재단(文柱獎學財團)>을 만들었다. 그때 직원들이 정치하려고 하는가보다고 생각했는데 문 회장은 자신과 약속을 지키려고 한 일이었다.

문회장은 '나와의 약속'을 실천한 것이었고, 벼르고 벼르던 사회공헌의 시작이었다. 장학재단의 등록증서를 받은 순간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또 하나에 스스로의 약속을 했다. '환갑이 될 때까지 재단 출연금 100억 원을 만들자' 작년에 그가 환갑이었는데 출연금이 334억 원이었다. 재단의 연 운용 수익이 약 8억 원 가까이 되는데 수익의 거의 전부를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총 2,215명의 학생에게 40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문회장이 마련한 문주장학재단은 장학금 수혜자의 성적이나 학교를 따지지 않는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 위주로 선발하며 장학생이 된 이후에 선정될 때 보다 성적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등록금의 100%를 지급합니다. 일부만 주면 나머지 학비를 벌기 위해 또 일을 해야 하는데 학비 걱정말고 학업에 전념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사회와 누군가를 위해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은 소망

문회장은 장학사업과 별도로 미래 우리나라를 책임질 후학양성을 위해 모교인 경희대학교 그리고 가천대학교에 발전기금을 후원(8억 원)했다. 2012년에는 서울시 관악구청 1층에 <용꿈꾸는 작은도서관>, 2014년에는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서울책방> 시설을 마련해 별도로 기부를 해오고도 있다.

젊었을 때 책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책을 사서 볼 돈이 궁해 조바심을 내던 본인의 모습이 떠올라서 흔쾌히 지원했다고 하는 문회장은 본인이 검정고시를 본 경험이 있어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 총회장을 맡고 있어, 매년 검정고시 준비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장흥 국제통합의학박람회', '전주 얼티밋 뮤직페스티벌' 등 다양한 문화활동도 후원하고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사회복지재단 정기 후원 및 쌀 기부, 119생명번호 서비스 후원, 경희의료원 의료봉사단 버스 기증 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는 문회장은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이 전달되어 그런 선함이 물흐르듯 흘러가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고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문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사회가 있고 소비자가 있어야 기업이 존재하듯이 기업이나 개인의 성공은 사회와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함께 한 덕분이라며 성공의 비결을 겸손하게 말했다.

이재훈 기자  ljh@ceomaga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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