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좋아하는 윤석열...9수 끝에 사시 합격
대쪽 성품으로 ‘살아있는 권력’ 맞서
원칙·소신 지키며 살아온 삶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사진=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사진=국민의힘)

[CEONEWS=최재혁 기자] 지난 3월 9일 실시된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당선이 확정됐다. 윤 당선인은 10일 1,639만 4,815표를 얻어 48.5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이 확정됐다. 확정 소식이 들리자 윤 당선인은 곧바로 서초구 자택에서 나와 지지자들을 향해 “밤이 아주 길었다. 그동안 응원에 감사드린다. 고맙습니다. 시민 여러분”이라며 그간의 소회를 간략하게 밝혔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5년을 책임질 대통령 당선인 ‘윤석열’은 누구고, 어떤 사람일까?

윤 당선인 돌잔치 사진(사진=국민의힘)
윤 당선인 돌잔치 사진(사진=국민의힘)

대통령 1수만에...사법고시는 9수?

1960년 서울시 성북구 보문동에서 태어난 윤석열 당선인은,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의 설립 멤버이자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인 윤기중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모자람 없이 자라온 윤 당선인은 1979년 충암고를 졸업하고 대학 선택을 신중히 하던 중, 본래 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심리학자를 희망했다. 공부도 꽤 잘했던 터라 서울대 심리학과에 진학해서 사회 현상을 연구하고자 했으나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법조인이 되는 게 가장 쉽고 빠르며 안전할 것”이라는 부친의 조언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윤 당선인의 정의는 대학교 새내기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1980년 5월 8일, 교내에서 진행된 모의재판에서 직접 판사 역할을 맡으며 자신의 정의를 관철했다.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에게는 사형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올바른 정의를 꿈꿨다.

당시에는 보도 통제로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든 시대였지만, 동아일보에 입사한 대학 선배들로부터 12.12 군사 반란 소식을 들어 이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후 신 당시 총리에게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쿠데타 수괴로 오인해 미안하다”는 뜻을 밝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할 줄 아는 면모도 보였다.

이후 모의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교내외로 퍼지면서 재판장을 맡은 윤석열 학생에 대한 구설수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기 바로 전날인 5월 17일,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는 먼 친척이 집에 전화해 “석열이를 빨리 피신시켜라”라는 말을 듣고 외가의 먼 친척 집에 석 달 동안 피신하기도 했다.

윤 당선인 서울대 졸업식 사진(사진=국민의힘)
윤 당선인 서울대 졸업식 사진(사진=국민의힘)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학교로 돌아온 윤 당선인은 술과 사람 만나는 걸 워낙 좋아해, 타 고시생들과 비교해 학습 시간이 무척이나 짧아 사법고시 1차 합격을 이루고서도, 2차에서 낙방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냐면, 2차 시험을 불과 며칠 앞두고 친구의 함진아비 노릇을 하러 대구까지 내려간 일화도 있을 정도다.

이대로 사법고시에 도전하면 자꾸만 떨어져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윤 당선인은, 대학원에 진학한 후 법학 석사학위를 받으며 9수 끝에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드디어 합격한다. 

청년시절 윤 당선인(사진=국민의힘)
청년시절 윤 당선인(사진=국민의힘)

 

지난 11월 8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제20대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한 첫걸음으로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국립현충원에서 이준석 당 대표 및 당 지도부와 함께 참배를 하였다(사진=국민의힘)
지난 11월 8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제20대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한 첫걸음으로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국립현충원에서 이준석 당 대표 및 당 지도부와 함께 참배를 하였다(사진=국민의힘)

살아있는 권력 맞서는 ‘원칙’ 수사

1994년 사법연수원을 거뜬히 수료한 윤 당선인은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1996년 춘천지방검찰청, 1997년 수원지방검찰청, 1999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검사라는 직업이 워낙 인사이동이 많은 편이지만, 윤 당선인의 거처는 2년에 한 번씩 옮길 정도로 무척이나 바빴다. 힘에 부치겠지만 윤 당선인은 “임관 당시 만 33살이었는데, 동기 중 2, 3번째로 나이가 많아 몇 년만 하고 관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며 “그러다 보니 늪에 빠져가듯 검사 생활에 취하다 보니 천직이라고 느껴졌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윤 후보의 강단과 원칙에 따른 수사는 연차가 쌓일수록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9년 김대중 정부의 경찰 실세로 꼽히던 박희원 당시 치안감을 소환해서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를 진행했고, 소환한 지 단 하루 만에 자백을 받아냈다. 당시 검찰 측에서는 “철두철미한 수사로 박 치안감은 영장실질심사 등을 모두 포기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참여정부가 시작된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인사이자, 선거 캠프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안희정, 강금원을 구속 수사했다. 윤 당선인은 이같이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원칙 그대로 정당을 가리지 않으며 수사에만 집중하며 꿈꿔온 정의를 실현해나갔다. 

윤 당선인은 2002년 잠시 검사복을 벗고 법무법인 태평양의 변호사로 변신했다.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이 자리를 내려놓으며 특검이 처음 생김으로써, 윤 당선인의 부서가 게이트의 중심이 돼 수사를 진행함과 동시에 수사의 대상으로 지적됐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그는 이명재 전 서울고검장의 권유로 함께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자신을 끌어준 이명재 전 고검장이 얼마 안 돼 검찰총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윤 당선인도 곧이어 검찰로 돌아갔다. 당시를 회상하는 윤 당선인은 “대검 중수부 산하 공적자금 비리합동단속반 일로 검찰에 출입하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익숙한 짜장면 냄새가 무척 그립게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며 “검찰이 그리웠다”고 전했다.

지난 11월 12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 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국민의힘)
지난 11월 12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 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국민의힘)

‘윤석열’ 이름 알린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

2013년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장에 오른 윤 당선인은 원칙과 소신을 인정받아, 당시 떠들썩했던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으로 임명됐다. 수사과정에서 그는 국가정보원을 압수 수색하는 등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을 흔들 수 있을 정도의 적극적인 수사를 임해, 언론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최종 책임자인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아들’ 스캔들 기사를 빌미로 사실상 쫓겨나게 되며, 살아있는 권력과 당돌하게 맞서는 ‘검사 윤석열’을 지켜줄 사람이 거의 없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 당선인은 국정원 직원들의 압수 수색과 체포 영장 청구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배제됐다.

하지만 당돌한 윤석열은 어떠한 권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여론조작 사건에 부당한 수사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적용되지 않아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1심 판결 후 윤 당선인은 여론조작 사건 관련으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와 “위법한 지휘·감독은 따를 필요가 없다”며 “누가 봐도 위법한 지시가 내려왔을 때 그것에 이의제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지시 자체가 위법한데 어떻게 따르냐”며 항상 지켜온 원칙과 소신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이후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상부 보고를 누락하는 등 절차를 어겼다며, 2013년 12월 검사징게위원회는 윤 당선인에게 정직 1개월의 징계 처분을 확정했다. 징계가 끝난 2014년 1월에는 대구고등검찰청 검사로 발령받았는데, 업계에서는 “명백한 좌천성 인사”라는 평이 다수를 차지했다. 2016년에도 대구에서 대전고등검찰청 검사로 발령받으며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있었다.

윤석열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사진=윤석열의 국민캠프)
윤석열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사진=윤석열의 국민캠프)

‘박근혜 게이트’ 통해 서울 입성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던가. 2016년 12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특별 수사를 담당하는 박영수 특별검사로부터 수사팀장으로 윤 당선인을 지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박근혜 정권에 첫 상처를 안겨줬기 때문에, 또 다른 상처를 내는 건 좋지 않겠다”며 고사했지만, 박 특검이 직접 나서서 합류를 종용해 수사팀장 자리에 앉게 됐다.

워낙에 큰 사건이라 특검은 수사팀을 총 4개로 나눴는데, 윤 당선인은 그중에 ‘뇌물죄 관련 대기업’ 수사팀장을 맡게 됐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에 대한 국민연금공단의 찬성 결정에 관한 수사를 바탕으로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의 꼬리를 무는 수사가 진행됐다.

마침내 2017년 1월 윤 당선인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삼성물산과 미르재단,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승마 지원 등과 관련한 정부와 이 부회장의 연결 고리를 묶은 것이다. 혹독한 수사를 통해 이 부회장을 구속하는 데 성공하고, 영재센터와 승마 지원의 뇌물죄를 재판부에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2017년 5월 탄핵 이후의 정국을 이끌게 된 문재인 정부의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윤 당선인이 임명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지방을 전전하던 검사가, 하루아침에 검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승진하게 된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윤 당선인을 임명한 이유로 “윤석열 검사가 검찰의 최대 현안인 최순실 게이트의 추가 조사 및 공소 유지를 원활하게 수행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검찰총장 시절 윤 당선인 프로필 사진(사진=검찰청)
검찰총장 시절 윤 당선인 프로필 사진(사진=검찰청)

대쪽 같은 수사...검찰총장까지

윤 당선인은 서울중앙지검장 임명 간담회에서 ‘민간인 댓글부대’와 ‘MB정부 블랙리스트’ 의혹 등 국가정보원에 대한 수사를 장기간 광범위하게 진행할 것을 시사했다. 이전과 달리 수사를 방해하는 상관은커녕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그이기에, 원하는 수사를 마음껏 꺼낼 수 있었다. 게다가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국정원 관련 사건이 터지면서 윤석열의 어깨가 더욱 든든해졌다.

이후 국정원 상납 사건과 사이버 댓글 관련 수사를 진행하면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이명박 정부의 최측근이었던 김진모, 김백준 전 비서관을 구속했다. 게다가 ‘다스’의 전·현직 임직원 자택과 BBK, 다스 관련 문서가 가득한 영포 빌딩의 지하 창고를 압수 수색하며 이명박 전 대통령의 숨통을 조였다.

마침내 같은 해 1월, 이 전 대통령을 피의자로 소환한 후 구속영장 발부까지 이끌며 화끈한 수사를 선보였다.

이어 윤 당선인은 검찰 역사상 전대미문의 사법농단 수사를 이끌며, 2019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을 포함한 법관 14명을 기소했다. 또 2019년 3월에 벌어진 연예계의 불법행위와 경찰 고위직과 경찰 내부 부패에 관련한 ‘버닝썬 게이트’를 수사하며 많은 이를 구속 수사했다.

뛰어난 수사 실력과 실적을 바탕으로 2019년 6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총장 후보자로 윤 당선인을 지명했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을 담보로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을 완수해 검찰이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고, 정의당에서도 “‘정치 검찰’의 오명을 씻고 검찰을 개혁하는 데 부합하는 인사”라고 크게 호평했다.

다만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검찰 내부에)이 정권이 불만 있으면 옷 벗고 나가라는 선언”이라고 밝혔다. 본래 검찰의 세계에서는 동기나 후배가 검찰총장이 되면 옷을 벗는 관행이 있어 이같이 말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소신과 원칙에 따른 인사청문회를 통해 시민의 많은 호응을 이끌었다. 비록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임명 채택을 거부하고, 정의당은 유보했지만, 문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임명안을 재가하며 2019년 7월 25일 0시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지난 11월 6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윤석열 대통령 후보와 이준석 당 대표가 오찬회동을 하고 있다(사진=국민의힘)
지난 11월 6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윤석열 대통령 후보와 이준석 당 대표가 오찬회동을 하고 있다(사진=국민의힘)

갈린 ‘조국’ 소신 지키며 지지율 1위까지

윤 당선인이 검찰총장에 취임한 지 한 달이 막 지났을 무렵,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조국의 딸 입시 특혜 의혹, 일가의 사모펀드 논란, 사학비리 등이 의혹이 줄줄이 터져 나오면서 검찰에 고발당했다. 

이와 관련해 법조계에서는 “윤 당선인이 적극적으로 수사에 임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검찰총장이 직속상관인 법무부 장관을 수사한 전례가 없는 데다가, 조국 후보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아끼는 인물이기 때문에, 윤 당선인이 척질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살아있는 권력과 모두 붙어본 윤 당선인에게 뜻을 굽힌다는 건 불가능했다. 같은 달 검찰은 조 후보자에 대한 전방위 압수수색에 나서며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했다. 원래는 서울중앙지검 형사부에서 배당한 사건이지만, 검찰 내 최정예 수사 부서로 꼽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재배당하며 윤 당선인의 마음가짐을 드러낸 것이다.

다음 달인 2019년 9월 조 후보자 딸의 동양대학교 표창장을 문제삼아 부인 정경심 교수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기소했다. 또 조 후보자 일가의 사모펀드 의혹과 관련해 관계자 구속 영장을 신청하고, 조 후보자의 5촌 조카를 인천공항에서 체포했다. 

이때부터 윤 당선인은 민주당과 지지자들에게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한 2019년 9월 초, 조국 지지자들은 윤 당선인에게 ‘엿’을 소포로 보냈고, 그를 기밀누설죄로 처벌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의 동의를 얻으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게다가 이해찬, 이재명, 이낙연, 유시민 등의 여권 주요 인사는 조 후보자 압수수색에 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며 각을 세웠다.

자연스레 문재인 정부와의 갈등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청와대의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청와대 울산시장 하명수사 의혹 등 문재인 정권 핵심부의 범죄 혐의를 겨냥한 수사를 검찰이 개시하자, 윤석열 사단이 지방으로 좌천되는 등 분위기가 달라졌다.

논란 끝에 조국 법무부 장관이 퇴임했고, 후임인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크게 대립한 윤 당선인은 문 정부 지지층에게 ‘검언유착의 대표적인 비리 정치검찰’이라는 거센 비난에 휩싸였다. 그러나 반대 진영에서는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하는 윤석열이 대통령 말대로 눈치 안 보고 엄격하게 수사했더니 보복성 인사를 단행한다”며 윤 당선인을 감싸고 문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윤 당선인과 여당 국회의원들이 강하게 충돌하며 시민의 지지는 반으로 갈라지게 되며, 추 장관은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2020년 11월 윤 당선인은 추 장관에 의해 ▲언론사 사주와의 부적절한 접촉 ▲조국 전 장관 사건 등 주요 사건 재판부 불법 사찰 ▲채널A 사건·한명숙 전 총리 사건 관련 감찰·수사 방해 ▲채널A 사건 감찰 정보 외부 유출 ▲총장 대면조사 과정에서 감찰 방해 ▲정치적 중립 훼손 등 6가지의 사유로 징계가 청구되었고, 직무 정지 처분을 받았다. 법원에 소송을 내, 곧바로 검찰총장에 복귀했지만, 껄끄러움은 여전히 크게 남았다.

이후 문 대통령에게 지지 않고 맞서는 이미지를 획득하며, 대통령 여론조사에서 간혹 1위를 차지하는 등 현직 검찰총장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불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지난 11월 5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제2차 전당대회에서 윤석열 후보가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최종 확정됐다(사진=국민의힘)
지난 11월 5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제2차 전당대회에서 윤석열 후보가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최종 확정됐다(사진=국민의힘)

20대 대통령 ‘윤석열’

27년간 ‘검찰 외길’을 걸어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9일 치러진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1,639만 4,815표를 얻어 48.5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이 확정됐다. 윤 당선인은 당선 ‘확실’이 뜬 뒤 서초구 자택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지지자들을 향해 “당선인 신분에서 새 정부를 준비하고 대통령직을 정식으로 맡게 되면 헌법 정신을 존중하고 의회를 존중하고 야당과 협치하면서 국민을 잘 모시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윤 당선인은 작년 6월 말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자신의 정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초 제3지대에서 세력을 구축할 생각이었지만, 정치 초보의 힘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해 국민의힘에 7월 말 입당하게 됐다.

지난해 8월 대통령 경선 후보 등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경선이 시작됐다. 강력한 경선 후보였던 홍준표 의원이 ‘무야홍(무조건 야권 후보는 홍준표)’ 열풍으로 윤 당선인을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원들의 거대한 지지에 힘입어 최종 득표율 47.85%로 국민의힘 최종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하지만 정치 초보다 보니 시련도 넘쳤다. 일명 ‘윤핵관’ 사태와 더불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내홍을 겪으며 살짝 흔들리기도 했다. 선대위를 해체하고, 아내 김건희 씨에 대한 논란과 윤 당선인 본인의 막말 논란까지 겹치며 큰 위기를 겪었다.
윤석열은 위기가 찾아올수록 강해졌다. 정치 초보지만, 끝없는 공부와 수련으로 막말 논란을 잠재우고,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와 끝내 단일화를 이뤄내며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됐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반전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삶은 부드러우면서 강단 있고, 험난하면서 거친 삶을 살아왔다. 유복한 가정생활을 보냈지만, 큰 뜻을 품고 법조인을 꿈꿨다. 검사로서 살아있는 권력에 맞서며 좌천도 당했지만, 끝내 뜻을 꺾지 않으며 세상에 능력을 인정받았다. 대쪽 같은 소신과 원칙으로 삶을 살아온 그는 대통령에 올랐다고 해서 삶을 부정하지는 않을 듯하다. 부디 엄정한 잣대로 주변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올바른 판단으로 대한민국의 5년을 찬란한 빛으로 가득하게 만들어주길 바랄 뿐이다.

윤 당선인과 환호하는 지지자들(사진=국민의힘)
윤 당선인과 환호하는 지지자들(사진=국민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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