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위한 마음

[CEONEWS] 10년도 더 되었나 보다. 경상도의 어느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평균 연령 65세. 나는 당시 30대. 어르신을 대상으로 '행복한 인생'에 관한 강의를 하기에는 지낸 세월이 너무 짧다. 파워포인트를 열고 클릭과 함께 현란하게 넘어가는 슬라이드, 재미와 의미를 겸비한 몰입도 높은 동영상들이 여느 때처럼 내 강연을 성공으로 이끄리라…

충청도의 어느 마을 강연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처절한 자기반성과 함께 귀한 배움을 얻게 되었다. 슬라이드쇼나 동영상으로 어르신의 시선과 마음을 집중시키려는 의도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임을 알았다.

경상도에서의 강연은 어떠했을까? 가끔 강의할 때 그분(?)이 오실 때가 있다. 그 날 오셨다! 그분이 오신 날에는 강의를 마친 후에 사람들의 인사줄이 길어진다.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고 소정의 특산물을 건네는 사람도 있다.

연예인이 이런 기분일까? 송해 선생님이 된 느낌! 그 중에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는 한 사람이 있다. 마지막을 기다린 듯했다. 칠순을 훨씬 넘긴 할아버지. 낡고 닳아서 너덜너덜한 가죽 겉장의 노트를 보여주며 사인을 요청했다. 많은 사람들과 초면에 나누는 인사는 다소 의례적이다. 뒤로 갈수록 더 그렇다. ‘아~ 이제 이 어른신이 마지막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값진 노트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그 분은 노트를 펼쳤다. 열 페이지는 족히 넘는 페이지를 순식간에 넘겼다. 내가 강연한 내용을 큼직큼직한 글씨로 또박또박 적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아래 부분을 가리키며 사인해 달라고 했다.

나는 노트의 정체가 궁금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노트 앞장부터 넘겨 보았다. 놀랍게도 강연 모음집이다!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초청한 명사들의 강연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기록한 것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어김없이 강연자들의 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노트가 집에 다섯 권이 더 있다고 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 노트는… 제 손자에게 줄 겁니다. 앞으로 제가 살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훌륭한 선생님들의 귀한 말씀이 담긴 이 노트를 보며 손자가 저를 떠올리면… 저 세상에서도 제가 행복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나는 아직도 아침 이슬보다 영롱했던 그 할아버지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할아버지~ 손자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손자의 이름을 크게 쓰면서 시작된 문장은 할아버지의 손자사랑이 오롯이 전해지도록 응원의 글과 함께 하트를 남겼다.

그리고 십 여년이 흘렀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노트를 받아 보았을까? 지금도 손자를 향한 마음으로 강연록을 써 내려가고 있을까? 사랑은 공간이다. 조건 없는 사랑은 숭고하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의 공간이 사랑으로 충만할 때, 온전한 사랑은 완성된다. 사랑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CEONEWS는 국제 의료 NGO ‘한국머시쉽‘의 활동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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