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김관수 기자] 오래도록 펴지 못한 책 한 권을 읽다가 문득 멀지 않은 곳에 책 속의 이야기들이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자필 기록 <백범일지> 속 공간 몇 곳을 찾았다. 그리고 선생의 마지막 안식처에서 선생과 이별을 나눴고, 마음의 빚을 조금은 내려놓은 것 같은 후련함으로 책장을 닫았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진=김관수 기자)
백범당 [사진=김관수 기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치하던 중국 상해와 중경에서 일생의 기록 <백범일지>를 남겼다. 늘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였기에 두 아들에게 지낸 일을 알리려는 동기로 유서를 대신해 살아온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고, 일흔을 넘긴 나이에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경륜과 소회를 알리기 위한 의지로 마무리 했다.

유년 시절부터 중국 상해로 망명하기 이전까지, 그리고 해방 이후부터 경교장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그때까지, <백범일지> 속에서 김구 선생은 한반도 방방곡곡에 발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선생이 그토록 염원했던 대한독립이 지금도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그의 흔적을 따라 갈 수 있는 여행지 역시 반으로 잘려 있다.

선생이 이 글을 쓰고 독립운동에 생을 걸었던 중국 땅도 코로나19에 막혀 가볼 수 없는 현실이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애써 마음을 가볍게 하고 가을바람에 잠시 몸을 맡겼던 시간 속에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된 완전한 독립을 부르짖던 선생의 간절한 마음을 조금씩 읽을 수 있었다.

감리서터 [사진=김관수 기자]
감리서터 [사진=김관수 기자]

인천 중구 감리서터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어디로 가느냐 한즉 그는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보통으로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 변성명을 할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명성왕후)를 죽인 삼포오루 놈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백범일지 중)

1896년 김창수(당시 선생의 이름)는 황해도 안악 치하포 인근 나루터에서 일본인을 죽인다. 한 해 전인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에 가담한 자라고 생각했고, 그 일본인은 일본군 중위 쓰시다로 알려졌다. 해주옥에 갇힌 창수는 인천옥으로 이송됐다.

인천옥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인천시 중구 내동(당시 내리)에 위치한 인천감리서가 있던 자리다. 감리서(監理署)대한 제국 때에, 개항장과 개시장의 행정 및 통상(通商)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 고종 20(1883)에 부산, 원산, 인천의 세 곳에 설치한 이후, 다른 개항장과 개시장에도 확대ㆍ설치하여 운영하다가 폐지하였다.(출처: 표준국어대사전)

마루터기에 감리서가 있고 그 좌익이 경무청, 우익이 순검청인데,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 이 모든 관아로 들어오는 이층 문루가 있었다.” (백범일지 중)

김창수는 이곳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국모의 원수를 처단한 영웅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의 대범함과 위인 됨을 알아 본 수많은 조선인들이 그를 따랐고, 일본인 간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창수는 사형을 선고 받고 말았는데,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던 그에게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 백범일지에서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법무 대신이 내 이름과 함께 몇 사형 죄인의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상감의 재결을 받았다. 상감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때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에 하나가 내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讎, 국모가 당한만큼 되갚아 준다)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뵈인즉 상감께서는 즉시 어전 회의를 여시와 내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시고 곧 인천 감리 이재정을 전화로 부르신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백범일지 중)

당시 사형 집행은 황제에게 승인을 받아야 했다. 때문에 소식을 접한 고종황제가 급히 인천으로 전화를 걸어 김창수의 사형 집행을 중지 시킨 것이다. 이 상황이 더욱 극적인 이유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전화가 개통된 시점이 고종황제가 전화를 걸기 바로 사흘 전이었고, 이 전화가 우리 역사에 국내 첫 장거리 전화로 기록됐다는 사실이다. 전화 개통이 미뤄졌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답동성당 [사진=김관수 기자]
답동성당 [사진=김관수 기자]

 

18983월 초 아흐렛날, 김창수는 인천옥을 탈출했다. 인천옥에 수감된 지 2년만의 일이었다. 지난 9월 인천시는 가상체험 게임 인천크래프트를 제작 발표했다. 이 게임에는 인천감리서-답동성당-해광사를 거쳐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탈출하는 김창수의 탈옥 시나리오가 포함됐고, 유저들은 게임을 즐기며 인천에 남아 있는 백범의 역사를 기억하게 됐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창수는 탈옥 후, 서울로 갈 작정으로 시흥 가는 길로 들었다고 한다.

1911년 선생은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1914년 다시 인천옥에 갇히게 된다. 당시 인천항 축항 공사 강제 노역에 동원 됐을 때에는,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하여 자진을 결심하기도 했다.

이렇듯 인천에서 백범은 인생의 커다란 굴곡을 겪었고, 당시의 고난을 이겨내고 임시정부 주석에 오를 수 있는 밑거름을 다졌다.

국가적 영웅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곳이자 여러 번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곳. 해방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다시 인천을 찾는다.

나는 삼팔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고 제 일 노정으로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 깊은 곳이다. 스물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 적에 십칠 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동인천역을 나와 찾아간 옛 감리서 자리에는 현재 안내판만 남아 있고 뒤로 고층 아파트가 자리를 지키고 섰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봤다. 인천자유공원, 차이나타운, 각국조계표지석, 제물포구락부, 신포국제시장, 답동성당 등 개항부터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두발로 걸으며 체험할 수 있는 코스 안에 옛 감리서도 있었다.

하지만 흐릿한 안내판 하나뿐인 인천과 김구와의 시간들은 우리에게서 잊힌 역사나 다름없다. 백범일지만이 기억하고 있는 책 속의 역사. 다행스러운 것은 현재 김구 선생의 시간도 문화관광유산으로 개발되고 있어, 인천에서 백범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소식이다.

마곡사 [사진=김관수 기자]
마곡사 [사진=김관수 기자]

공주 마곡사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을 읽을 때에 서화담 경덕이 마곡사 팥죽 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서 동지 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인천옥을 탈출한 창수는 삼남을 떠돌다가 계룡산 갑사에서 공주 사람 이 서방을 만나 계획에도 없던 마곡사로 향한다. 그리고 이 서방의 권유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변신을 단행한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단 하룻밤이 필요했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으므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에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 진언(다라니)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섬뜩하여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언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명 원종. 하지만 마곡사에서의 정신수양은 평탄하지 못했다. 은사 하은당이 선생을 들들 볶아 절간에서의 생활은 고됐고,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도법에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생기지 않았다. 결국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지 6개월 후, 선생은 다시 바깥세상으로 떠난다.

소식을 모르는 부모를 찾아, 사형이 내려진 그를 구하려다 집과 몸까지 잃어버린 김주경을 찾아, 정신적 스승인 해주 비동의 고후조 선생을 뵈러, 안중근의 아버지인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 사과를 하러 태화산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1899년이었다.

소승이 기왕 중이 된 이상에는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 공부를 하고 일생에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후, 평양 영천암의 방주가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독교에 입교한다. 1901년 부친상을 당하고 1904년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였으며, 1911년 안명근 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 다시 수감되었다.

19193.1 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을 담은 지 약 27년 후, 선생은 마곡사를 다시 찾았다. 첫 번째 방문지인 인천에 이어 공주 마곡사를 찾은 걸 보면, 그에게 있어 마곡사는 평생 내려놓지 못한 마음의 짐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십 팔 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다. 산천도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도 옛날 그대로다. “그때에는 무심히 보았던 이 글귀를 오늘에 자세히 보니 나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았다.”

일주문 [사진=김관수 기자]
일주문 [사진=김관수 기자]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보니 꿈속의 일만 같구나.

태화산 마곡사 일주문 앞에 걸려 있는 태극기가 유독 눈에 띈다. 절집까지는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았지만, 벌써부터 선생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당시에는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였다고 하지만, 아직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가을의 입구에 닿았을 뿐이다. 길을 따라 함께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해탈문까지 발길을 시원하게 해줘 위안을 삼는다.

절 안 그리고 절 밖, 태화산 곳곳에 백범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다. 해방 이후 찾아와 하룻밤을 묵은 선생이 떠나기 전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와 선생의 글씨와 얼굴이 든 액자가 걸린 작은 집 백범당은 승려 원종의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백범명상길 [사진=김관수 기자]
백범명상길 [사진=김관수 기자]

절집에서부터 백범명상길이 이어진다. 3개의 코스 중 제1코스를 따라 걸었다. 절 뒷문으로 나서면 선생이 머리를 깎았던 삭발터가 보인다. 흐르는 계곡물 위로 그의 머리가 떨어져 어디론가 흘러갔을 것이다.

산길을 올라 우거진 송림을 지나 다다른 곳은 군왕대(君王垈). 마곡에서 가장 지기가 강한 곳으로 가히 군왕이 나올만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피의 군주라 불리는 조선의 세조가 이곳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라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 만세기 동안 망하지 않을 땅)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구나.”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마곡의 기운은 그렇듯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선생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어른이 되는 데 마곡사에서의 6개월은 군왕의 기운을 가득 담아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백범이 심은 나무 [사진=김관수 기자]
백범이 심은 나무 [사진=김관수 기자]

효창공원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의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하게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크게 기억되고 있는 거사들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저격, 윤봉길 의사의 상해 폭탄투하, 이봉창 의사의 도쿄 폭탄투하. 그들의 이름이 모두 효창공원에 잠들어 있다.

백범묘지 [사진=김관수 기자]
백범묘지 [사진=김관수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서부터 주석으로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독립운동을 이끌며 김구 선생이 가장 마음의 빚을 크게 진 이름들이 지금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세 의사와 아직 유골을 찾지 못한 채 가묘 상태로 자리만 잡아 놓은 안중근 의사였다. 선생은 해방 이후 이분들을 고국으로 모셔오는 일을 잊지 않았고, 최대한 빠른 시일에, 최대한 정중하게 의사들을 모셨다그리고 본인도 이 공원에 묻혔다.

1949년 안두희의 충격적인 총격 사건에 의해 국민들은 바라지 않았던 한 영웅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인천옥에서 여러 번 잃을 뻔했던 목숨, 고종황제가 살리고 그를 지지하던 수많은 민초들이 살렸지만, 그는 그리 허망하게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70년의 시간이 흘러간 지금, 우리가 선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기록되지 못한 이야기의 진실을 밝히고, 하루빨리 선생이 편히 잠들 수 있게 해주는 것 아닐까. 효창공원 선생 앞에 앉아 백범일지에 기록되지 못한 그날을 떠올려 본다.

백범기념관(사진=김관수 기자)
백범기념관(사진=김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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