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소외된 서민계층과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 터”

대한사회복지개발원 윤석용 이사장

대한사회복지개발원은 어렵고 소외된 지역주민을 위한 복지사업을 진행하고자 성내종합사회복지관을 1994년에 개관하여 지난 20여년간 지역사회 복지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또한 주민과의 소통과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공감복지의 장을 구현하는 종합적인 사회복지센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에 윤석용 이사장을 만나 30여년간의 서민복지를 향해 달려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복지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사재를 출연하여 ‘대한사회복지개발원’으로 전환
대한사회복지개발원은 윤 이사장이 개별적으로 추진된 서민복지사업들도 있지만, 서민들을 위한 지원사업들은 주로 1983년에 설립된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통해서 추진되었다. 『강동사회복지개발원』에 10여 년 간 매년 2∼3억원이상의 사재를 투입하여 무료진료, 무료탁아, 장애인 재활지원, 서민생활지원 등의 복지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복지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조금 더 체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1992년에 사재 10억원을 추가로 출연하여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사회복지법인『대한사회복지개발원』으로 전환시켰다.

윤 이사장은 “대한사회복지개발원은 주로 위탁운영 기관인 『성내종합사회복지관』을 통해 복지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200여세대의 무의탁 노인 및 장애인들에게 도시락을 제공하는 등 복지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법인설립 전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이어온 노인위안잔치를 개최하고, 청소년 장학지원, 이?미용 봉사, 실버아트 봉사, 유언 대행사업, 다문화가정, 탈북자 정착지원 사업 등의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추진해 오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차별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
윤 이사장은 1951년 대구에서 한의학을 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1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한 때 목만 움직일 수 있는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도움과 윤 이사장의 끊임없는 재활노력으로 차츰 걸을 수 있게 되었고, 훗날 비장애인도 오르기 힘들다는 설악산 대청봉도 오를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에 윤 이사장은 “성장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한 마음가짐과 성실함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개근상을 받는 등 타의 모범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차별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늘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신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를 보답하듯 저는 가난하고 힘없는 장애인과 소외받는 자를 위해 살아가라는 소명감을 뒤늦게 깨닫고 평생 이들을 돌보면서 살기로 다짐을 하였고,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고 말했다.

 

장애인으로는 최초로 한의대 입학
윤 이사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매우 심했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실력이 있어도 의대나 한의대 진학이 거부되곤 하였다. 그러나 윤 이사장은 부모님의 권유로 경희대학교 한의학과에 도전하였다. 필기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는 등 우여곡절 끝에 장애인으로는 최초로 입학을 하였다. 대학시절은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당시 유신체제와 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소외계층과 어려운 이웃의 고통, 그리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윤 이사장은 “당시에는 학업만큼이나 사회개혁운동이 저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당시는 유신정권 아래 국민의 기본권이 억압되고, 인권이 유린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많은 국민들의 생존권 요구가 묵살되고 빈곤계층에게는 기본적인 복지혜택도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제적처분을 받고 6년간 학교를 떠나 있어야 했습니다. 집안의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져 포장마차, 건축노동자, 타일판매상을 한 것이 훗날 어려운 사람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80년에 대학에 복학한 뒤, 한의사자격증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1981년에 강동구 천호동에 ‘천호한의원’을 개원하였습니다.”라며 한의사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어려움을 피력했다.

저소득층,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 활동에 전념
개업 후 한의원에 오시는 분들 중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제대로 진찰 한 번 못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윤 이사장은 “이들에게 ‘더불어 잘 사는 세상 만들기’는 아픈 몸을 치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한의원 개업 이후 밤 11시까지 정신없이 바쁜 진료가 이어졌지만 무료진료를 하기로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난지도, 양평, 미사리 등을 순회하면서 무료 진료를 하였고, 천호한의원에서도 저소득층,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당시에 천호한의원은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한의원이 되었지만, 내원 환자의 20% 정도가 생활형편이 어려운 무료 진료 환자들이었습니다.”고 회고하며 말했다.

또한 윤 이사장은 “지난 199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의 통합교육기관인 『곡교어린이집』을 설립하였습니다. 이는 어릴 때부터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이 평등한 인격체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하려면 통합보육의 도입이 절실하다고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으로 설립된 『곡교어린이집』은 제1회 우수 어린이집 선정대회에서 1위로 선정되어 유니세프,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시찰을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깨동무어린이집』(1994년 개원, 영등포 소재), 『신바람어린이집』, 『무궁화어린이집』등을 설립하여 유아교육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던 저소득층 어린이들과 장애아동 돌보기에 나섰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장애아동 교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내가 할래요』, 『캐롤라인 학습』등의 책자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고 덧붙였다.

 

국내 최초로 이동목욕 차량을 직접 설계 제작하여 보급 운영,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
윤 이사장은 장애인복지를 처음 시작할 때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지원해야 효율성이 높은지 고민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본인의 경우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가 ‘목욕’이었다. 장애인들은 재래식 가옥에서 명절에나 부엌에서 목욕을 할 수 있었지 대중탕은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윤 이사장은 “제가 주위를 살펴보니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목욕을 할 수 없는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분석을 통해 장애인과 노약자들에게 목욕을 마음껏 시켜줄 수 있게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목욕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최초로 이동목욕 차량을 직접 설계?제작하여 보급?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수 백 대의 이동 목욕차가 운행되고, 요양보험제도를 통하여 이동 차량에 의한 목욕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으나, 저는 아직 한 번도 이동목욕 차량의 특허권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소원이 있다면 통일이 될 때 북녘 땅 내 형제들에게 이동목욕차량으로 목욕을 시켜주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윤 이사장은 그 동안 사업이나 한의원 운영을 통하여 얻은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그 동안 무료진료사업, 어린이집 운영사업, 장애인 재활사업, 사회변혁운동 등에 투여한 재산은 어림잡아 70~80억 원이 된다고 한다. 그는 지금 본인 소유의 아파트 한 채 없으며, 1억 7천만원에 아파트 전세를 얻어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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