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상 사이의 경계에서-

 

 [CEONEWS=김영란 기자] 라 카페 갤러리17번째 전시,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2020115일부터 628일까지 전시되고 있다. 결핍과 고난 속에서도 단순한 살림으로 풍요롭고, 단단한 내면으로 희망차고, 단아한 기품으로 눈부시게 살아가는 지구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37점의 흑백사진과 이야기로 펼쳐진다.

페루, 파키스탄, 수단, 인도네시아 등 박노해 시인의 사진 속 지구의 고원길을 산책하며, 2020년을 살아갈 새 힘으로 걸어보는 기회가 되길...

 

나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어리석은 것과 지혜로운 것,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식별하는 잣대가 있다. 좋은 것으로 나쁜 것을 만드는가 나쁜 것으로 좋은 것을 만드는가.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드는가. 물질의 심장을 꽃피워내는가 심장을 팔아 물질을 축적하는가.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꽃피우는 것이니. 하여 나의 물음은 단 세 가지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일도 물건도 삶도 사람도. 내 희망은 단순한 것. 내 믿음은 단단한 것. 내 사랑은 단아한 것. 돌아보면 그랬다. 가난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고난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고독이 나를 단아하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들은 나를 더 푸르게 하였다. 가면 갈수록 나 살아있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박노해 사진에세이 02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중에서

 

 

35_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ParkNohae
35_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ParkNohae

 

거대한 모래폭풍인 하붑이 지나가고

누비아 사막에 푸른 여명이 밝아오면

청나일강에도 아침 태양이 떠오른다.

하지만 사막의 진정한 태양은 여인들이다.

단순한 살림으로 삶은 풍요롭고

단단한 내면으로 앞은 희망차고

단아한 기품으로 주위가 다 눈이 부신

사막의 아침 태양은 그녀들이다.

내 생의 모든 아침은 바로 그대이다.

 

19_세상에서 제일 높은 학교 ⓒParkNohae
19_세상에서 제일 높은 학교 ⓒParkNohae

 

지구의 등뼈인 안데스 고원 5천 미터 높이에

잉카의 후예인 께로족이 5백 년째 살고 있다.

께로스 주민들은 대대로 아이들에게 물려줄

세계에서 가장 높고 작은 학교를 지었다.

엄마가 알파카 털로 짜준 전통 옷을 차려입고

새벽부터 두세 시간을 걸어 학교에 온 아이들이

친구를 보자마자 빨갛게 언 볼로 신나게 뛰논다.

고원이 단련해준 강인한 심장으로

고독이 선물해준 천진한 웃음으로

결핍이 꽃피워준 단단한 우정으로

세계에서 제일 높고 작은 학교에서

세상에서 제일 크고 환한 웃음소리가 울린다.

 

26_두 세상 사이의 경계에서 ⓒParkNohae
26_두 세상 사이의 경계에서 ⓒParkNohae

 

버마의 아이들은 일생에 한 번 단기 출가를 한다.

부모의 품을 떠나 머리를 깎고 나면

가진 건 가사 한 벌과 밥그릇 하나.

아침마다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밥을 공양하는

민초들을 맨발로 만나는 의 시간을 걷고 나면,

사원에서 홀로 수행하는 의 시간이 시작된다.

승과 속, 두 세상 사이 경계의 문에 서서

경전을 독송하는 동자승의 목소리가 낭랑하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내 안의 빛을 밝혀 진리의 등불을 비추는 시간.

이 순간의 신비와 내면의 느낌을 간직한 아이들은

두 세상 사이 순례자의 걸음으로 살아가리라.

 

34_올리브나무 신전 ⓒParkNohae
34_올리브나무 신전 ⓒParkNohae

 

2,200여 년 전 세계 최초의 양피지, 최초의 병원 등

수많은 최초를 탄생시킨 영광의 고대 도시 페르가몬

그 화려한 시대도 치욕의 시간도 뒤로 하고

아크로폴리스 신전들은 세월의 풍파에 소멸 중인데

폐허의 유적지에서 유일하게 푸른 생기로

바람에 날리는 올리브나무의 전언傳言을 듣는다.

모든 것을 쓸어가는 시간의 바람 앞에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살아날까.

무엇이 잊혀지고 무엇이 푸르를까.

역사의 조망에 비추어 정녕, 무엇이 더 중요한가.

 

 

36_내 마음 깊은 곳의 방 ⓒParkNohae
36_내 마음 깊은 곳의 방 ⓒParkNohae

 

안데스 산맥에 둘러싸인 고원 위에 서 있는

산타 카탈리나 봉쇄 수도원Monastery of Santa Catalina

1580년에 세워져 400여 년간 외부와 단절한 채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품고 침묵의 불로 타올라왔다.

열여덟에 여기 들어와 한평생 청빈과 노동과

침묵으로 기도를 바치다 선종한 수도자의 방.

필사적인 자기 소유와 자기 홍보의 시대에

지상의 높고 깊은 자리에 빛나는 한 평의 방.

지상에서 내가 이룬 업적들은 먼지처럼 흩어져도

아 나는 무력한 사랑의 마음 하나 바치며 이 길을 가네.

 

 

박노해
박노해

박노해

1957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1984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군사독재의 감시를 피해 사용한 박노해라는 필명은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뜻으로, 이때부터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된 노동의 새벽은 잊혀진 계급이던 천만 노동자의 목소리가 되었고,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면서 한국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1989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7년여의 수배생활 끝에 1991 체포,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1993 옥중 시집 참된 시작, 1997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998 7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 보상금을 거부했다. 2000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의 길을 뒤로하고 생명 평화 나눔을 위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www.nanum.com)를 설립했다. 2003 이라크 전쟁터에 뛰어들면서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 등 가난과 분쟁 현장에서 평화활동을 이어왔다. 2010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로 기록해온 사진을 모아 첫 사진전 라 광야나 거기에 그들처럼(세종문화회관)을 열었다. 304편의 시를 엮어 12년 만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2012 나눔문화가 운영하는 좋은 삶의 문화 공간 라 카페 갤러리에서 글로벌 평화나눔 사진전을 상설 개최하고 있다. 2014 박노해 아시아 사진전 다른 길(세종문화회관) 개최와 사진집과 사진에세이 다른 길을 출간했다. 2019 박노해 사진에세이시리즈의 첫 권인 하루를 펴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자급자립하는 삶의 공동체인 나눔농부마을을 세우며 새로운 사상과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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