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의 혼불, 경제 혼란 반동의 인간 군상

엄금희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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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NEWS=엄금희 논설주간] 미국과 중국 간 무역분쟁에 휘청대던 세계경제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가장 부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20년 세계경제 전망을 'Precarious recovery', 위태로운 회복으로 보며 거듭 하향 조정될 위험이 상존한다. 우리나라는 정치적, 지정학적 혼란의 지속으로 위태로운 회복 전망에 경제성장률 1%대의 조기 진입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불확실성 경제 전망에서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는 책이 '혼불'이다. 모든 인간의 삶의 가치가 물질에 의해서 재단되는 현대경제의 가치에서 볼 때 최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혼불'은 반동적인 인간 군상의 주제를 담고 있다. 경제의 가치인 물질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가치를 숭고하게 여기고 소중히 하라고 나지막 하지만 존재의 깊숙한 곳을 울리는 혼의 목소리를 품어 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혼불'은 고전적 경제 가치에 대한 목마름을 인문학적 인간 형태의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 시작을 들여다본다. 우리는 혼불의 마을에서 여장을 풀고 며칠을 묵게 된다. 단아한 초가집, 이끼 끼고 내려앉은 흙벽들, 우우우 소리 내는 대숲의 바람 사이로 간간이 양반집이 보이고 어느 양반집 마당에서 펼쳐지는 왁자지껄한 혼례식 풍경이 정겹고도 흥겹다. 이 혼례식의 주인공인 까까머리 새신랑을 싣고 훗날 떠날 남만주 봉천행의 기차도 우리 곁을 지난다. 새색시 효원의 한숨도 이 혼례부터 시작된다.

이 반촌에서 멀리 떨어진 미천한 거멍굴 사람들의 한숨소리도 새어 나오는데, 성냥간에서 연신 풀무질을 하는 금생이와 백정 택주의 솜씨 좋게 소 잡는 모습도 보이고 당골네 백단이의 귀신 부르는 신들린 노랫가락도 한 구절 듣게 된다. 숟가락 밥그릇도 공출로 빼앗기는 암울한 시대, 모든 게 꿈같이 허망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 있으니 그것이 혼불의 마을이다.

마치 빈부격차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듯 '혼불'은 경제의 원리를 설명하기에 참으로 적절한 문학적 교과서이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아직도 죽지 않고 어디선가 매안 이 씨 종가 주변을 서릿발 같은 기상 어린 눈으로 주시하고 있을 것만 같은 청암 부인. 그녀를 여자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녀는 여자이고 사람이기 이전에 종부였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태어날 때부터 그만큼의 운명과 그릇을 타고난 종부이다.

혼불 속에는 인간의 삶이 살아있다. 나약한 강모, 현실에 기민하게 계산하고 타협하는 이기표, 신분의 벽을 넘고 싶어 하는 춘복, 팔자에 순응하는 공배... 최명희는 이들을 저울질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문벌 높고 사철 먹을 것 넘치는, 원뜸 이 씨 종가에 시름 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땡볕에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펼 여유 없어도, 가난한 저녁 상 물리고 고만고만한 이웃과 정담 나누는 공배 가족의 삶이 모자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명희는 '혼불'에서 여러 인간 계층의 군상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이야기이지만은 그 너른 품 안에서 그들 내면의 다채로운 무늬를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종갓집 며느리로써 대범하고 강단 있는 효원이, 조선의 대장부 여성상이라고 표현될 청암 부인, 혹은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충직한 안 서방, 신분 상승을 꿈꾸며 세상이 뒤집어지기만을 바라는 상것 춘복이와 그를 꼬드기는 옹구네, 그 모두가 우리 기억 저편 삶의 기록들이다. 덕석말이를 시키는 원뜸의 양반네나 그걸 당해야 하는 거멍굴의 상것에서나 그것은 싫다 좋다 할 수 없는 조선 사람의 운명이고 풍속이고 삶이었다. 피가 터지고 살이 갈라져도 이미 경제의 눈으로 봐서 선악의 개념이 없다.

최명희는 경제적 가치와 선악의 개념에서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정답을 묻고 있지 않다. 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조심스럽지만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경제적 부와 가치가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단순히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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