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 Note] [페드라 (Phaedra, 1962)] 비 내리는 밤 떠오르는 그리스 비극의 현대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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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 Note] [페드라 (Phaedra, 1962)] 비 내리는 밤 떠오르는 그리스 비극의 현대적 해석
  • 장용준 기자
  • 승인 2019.11.2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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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현의 시네뮤직>에서 그리스 출신 음악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가 참여한 영화들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그리스 영화인 [페드라], [그리스인 조르바]와 함께 [형사 써피코]까지 훑어보면서 마지막으로 소개한 작품이 [게엄령]. 모두가 다 추억의 영화들인데...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주말 밤에 특히나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영화는 바로 [페드라]였다. 

[CEONEWS=장용준 기자]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그리스 비극풍의 영화이면서 한 번 보면 그 마력에서 쉽사리 벗어나기 힘든 영화 [페드라]. 술자리나 친한 친구들의 모임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이 작품을 거론할 때 크게 세 가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페드라의 비극>을 현대물로 옮긴 것이라는 점. 또, 산토리니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비 내리는 파리에서 뜨겁게 타올라 여름밤을 불태우는 격정적인 사랑의 힘.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을 잠재우는 엔딩을 아우르는 배경음악의 무시무시한 위력이 그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볼 때만 해도 '감독, 여주인공, 영화음악'의 중요성이나 위대함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당시엔 그저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흑백화면임에도  특유의 자연미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며  정열적인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그리스. 그 언젠가 한 번은 가 보리라 꿈꿔봤던 그곳에 대한 환상이 마음 한켠에 자리잡았다. 이제서야 총천연색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그리스 산토리니의 코발트빛 하늘과 바다를 떠올릴 수 있는 배경이 눈을 사로잡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1세기인 지금도 신화와 전설이 존재하며 끊임없이 재생되는 크레타 섬.  '페드라의 비극'은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신화이자 전설이다.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한 영웅 테세우스가 자신을 도왔지만 팜므파탈이었던 아리아드네를 버린 뒤 그녀의 동생인 페드라와 결혼하면서 잉태된 예정된 비극. 페드라는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에게 반해 끈적한 유혹을 하지만 거부당한데 앙심을 품고 자신이 히폴리토스에게 능욕당했다는 누명을 씌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버린다. 사랑에 눈이 먼 테세우스는 아들에게 분노를 퍼붓고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부탁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페드라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변명 한 마디 없이 전차를 몰고 해변 절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 괴물을 맞딱뜨리고 죽고 마는 비극.

1962년작 [페드라]

​'줄스 다신' 감독이 이 비극의 배경을 현대로 옮겨 [페드라]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한 것이 1962년. 이제는 영화마저도 50년을 훌쩍 넘은 또 다른 고전이 됐다. 이 작품에서 테세우스는 그리스 선박업계의 떠오르는 사업가 타노스로, 페드라는 그리스 선박왕의 딸로 각색된다. 신화 속 테세우스가 반신반인 즉, 신 다음 가는 절대적인 영웅이었다면, 영화 속 현대의 테세우스는 1960년대 전성기를 누리던 그리스 해운업계의 총아로 그려진 셈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신화를 빗대어 1960년대 권위주의와 억압으로 물들었던 그리스 사회를 비판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

​신화 속에서 세 사람의 관계가 오해와 반목, 애증의 관계로 그려진데 반해 이 작품 속에서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와 타노스의 아들 알렉시스(안소니 퍼킨스)는 런던에서 파리에서 그리스에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열적으로 빠져든다. 30대의 농염한 여인 페드라와 24세의 젊은 알렉시스가 반하게 되는 상황을 당시엔 육체적 욕정으로만 치부하고 정신적인 부분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하게 된 페드라와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알렉시스는 동병상련의 관계. 이심전심이 바로 이럴 때 쓰이는 말인지도.

​혈연은 아닐지언정 새어머니와 아들인 두 남녀가 사랑에 빠져드는 비극을 그리는 과정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뜨겁게 타오르는 두 남녀의 정사가 벌어지는 방 너머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의 대비. 타오르다 꺼질 수밖에 없는 장작불처럼 예정된 비극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아가는 두 남녀의 사랑을 보며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배경음악을 듣게 된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처음 개봉됐던 1967년(<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들어왔다)에는 바로 이 정사 장면이 삭제되었고 페드라는 새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의 애인으로 설정이 바뀌었던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타노스가 알렉시스에게 007 제임스 본드가 애용하던 차로 유명한 '애스터 마틴'의 스포츠카​를 선물한 뒤 한 노인이 "꼭 관 같구먼"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테세우스가 포세이돈에게 아들의 저주를 부탁한 뒤 히폴리토스가 전차로 생을 마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스포츠카가 곧 관이 된 셈이니 복선이라면 복선.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번민하던 두 남녀는 결국 알렉시스가 폭주하면서 파국을 맞이한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 아버지로부터 두들겨 맞은 알렉시스는 울부짖는다. "난 다시는 페드라의 얼굴을 보지 않을거예요. 난 페드라가 죽어버리길 바라요. 나는 스물네 살이예요. 그게 전부예요."  사랑의 비극은  결국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다. 페드라는 수면제를 과용한 채 죽음을 맞일하고, 알렉시스는 눈부실 만큼 푸른 에게해의 절벽에 자리잡은 해안도로에서 스포츠카를 몰고 죽음의 사신을 배웅한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Tocate & Fugue, F Major BWV 540)'는 기존의 장엄함이나 클래식의 매력을 뒤로 하고 권위와 억압에 도전하며 "라라라라~~~" "페드라~"를 외치며 최후를 맞이하는 앤소니 퍼킨스의  절규가 그대로 담긴 이 작품의 엔딩을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렬한 2분"으로 장식하게 한 일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줄스 다신'과 여주인공인 '멜리나 메르쿠리'는 부부였다는 사실 외에도 그리스 정치와 문화사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긴 존재들이다. 줄스 다신은 미국인이지만 그리스를 사랑했으며, 이 작품 외에도 [일요일은 참으세요] 등의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독재에 항거하다 정치적 망명을 한 후 정권이 교체된 뒤엔 문화부 장관까지 했던 행동하는 양심이자 연기자였다. 이 작품에선 줄스 다신은 연기자로서  등장하기도 한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이 작품의 배경음악 중 'Agapimou'와 'Love Theme'를 직접 불렀다(꼭 한 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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